자살엔 용서가 없다

부화하고 있는 알.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고통 없이 알을 깨고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이처럼 소중하게 태어난 생명,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을까? 하물려 사람의 목숨이야…

‘전분세락(轉糞世樂)’이란 말이 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생이 더 즐겁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고 등지는 사람이 많을까? 2021년 12월 28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OECD 국가 중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를 유지했다. 하루 평균 36.1명이 자살하는 셈이다.

자살의 요인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살은 죄악’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죽고 싶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세상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천수를 누리다 간 사람들은 절대로 형제나 자손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런데 자살로 죽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자살한 사람은 귀신이 되어 형제나 친지들에게 자기를 구원해달라거나 억울함을 해원해 달라고 달라붙는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서 풀지 못한 영혼이 죽어서 원을 풀 수는 없는 일이다.

죄 중에서도 생명을 끊는 죄는 용서가 없다. 이것은 진리의 영역을 침범한 죄이기 때문이다.

자살 충동을 이겨내야 한다. 자살은 최악의 죄인이 되는 것이다. 자살을 하면 영원히 불귀의 원혼이 돼 구천을 떠돌게 된다. 생명은 누구나 소중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함부로 할 수가 없는 진리의 영역임을 깨닫고 절대로 자살을 미화하면 안 된다.

우리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만 누리는 천국이고 극락인 것이다. 그래서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 세상이 더 즐겁다고 하지 않았을까?

우리 생명이라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미물 곤충이라도 함부로 죽여서도 안 된다. 하물며 자살을 하면, 그 과보를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유태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최악이 아님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살아 숨쉴 수 있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걸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과 남은 것 중에서 늘 잃어버린 것만 생각하며 아쉬워하고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내게 무엇인가 남아있고 그걸 바탕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일까? 비록 모두 다 잃었다고 해도 내 몸이 성하다면 그보다 고마운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가난한 처지에 대해 항상 불평을 늘어놓던 청년에게 어떤 노인이 물었다.

“자네는 이미 대단한 재산을 가졌으면서 왜 아직도 불평만 하고 있나?” 그러자 청년은 노인에게 간절하게 물었다. “대단한 재산이라니요? 아니 그 재산이 어디에 있다는 말씀이세요?” “자네의 대단한 재산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은가? 좋네, 자네의 양쪽 눈을 나한테 주면 자네가 얻고 싶을 것을 주겠네.”
“아니, 제 눈을 달라니요? 그건 안 됩니다!” “그래? 그럼, 그 두 손을 나한테 주게 그럼 내가 황금을 주겠네.” “안 됩니다 두 손은 절대 드릴 수 없어요.”

그러자 노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 눈이 있어 배울 수 있고, 두 손이 있어 일할 수 있지 않은가? 이제 자네가 얼마나 훌륭한 재산을 가졌는지 알겠구먼.”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재물이나 명예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건강이다. 돈이 없으면 살아가는데 불편하지만 살 수는 있다. 또 명예를 잃으면 당당하진 못하더라도 살 수가 있다.

물론 살 수 있다고 다 기쁘고 행복한 건 아니다. 그래도 살아 숨 쉬며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기쁘고 행복한 일은 없다. 살아있으니 인생을 논할 수가 있는 것이고, 희로애락도 삶을 이어갈 수 있을 때라야 의미가 있다.

누리며 살아가는 즐거움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건강이다.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건강, 잃지 않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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