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택시강도③] “사람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이 이런 걸까?”
“‘불안전 지대’. 멕시코에서 예전엔 웬만하면 금전만 갈취하고 위해는 가하지 않았다. 요새는 총부터 쏘고 본다. 교민 한분은 얼굴에 총을 맞아 광대며 치아, 턱 한쪽이 거의 날아가 여전히 엄청 고생 중이다. 얼마 전엔 또 다른 교민이 우리 회사 인근 도로에서 총격을 당해 허벅지를 관통했다고 한다. 다행히 두 사람 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데 거동은 얼마나 불편할 것인가? 20여년 전 필자가 직접 체험한 택시강도사건을 소개한다. 그나마 요즘 상황에 비하면 천만 다행이었다.” 멕시코에서 특수화물운송회사 판트란스를 경영하는 홍금표 대표의 경험담입니다. 1968년 올림픽, 1970년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의 일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멕시코 역사의 수레바퀴는 뒷걸음질을 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시아엔>은 홍금표 판트란스 대표의 체험적 현지소식을 전합니다. <편집자>
당시 왜 나는 그런 비논리적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왜 다들 털려도 나만은 아니라는 근거 없고 오만한 선민의식에 젖어 있었을까?
사실 강도는 공평하게도 그들의 작업 범위 안에서 걸리는 대상 모두를 털고 있었고 늦었지만 나에게도 결국 차례가 온 것이었다. 나의 착각은 참으로 자유였고 그 댓가는 치명적이었다.
택시는 계속 어둠속의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가끔 스쳐가는 승용차도 있었지만 그 뿐이었고 두대의 경찰 패트롤이 경광등을 번쩍이며 지나갔어도 역시 그 뿐이었다. 순간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런데 그 말은 호랑이에게만 적용되는 것인지 아무리 정신을 가다듬어 보아도 도저히 강도들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택시 안의 어둠은 나의 분별력마저 어둡게 했다. “무기를 꺼내 위협하지 않고 폭력만을 사용해 제압하려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 강도들은 특별한 흉기나 무기가 없을지도 모른다.”
“4대2, 숫적으로는 열세지만 운전자 빼고 나면 3대2니 해볼만하지 않은가?” “더욱 A사장은 주먹도 잘 쓴다지 않는가?”
종종 들어온 그의 무용담은 한번 해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신으로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더더욱 그날 내 지갑 속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금액의 페소 체크 몇장과 수금된 액면 1000달러짜리 여행자 수표 50장 즉 5만달러의 거금이 들어 있었다. 한화로 약 6000만원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IMF의 어둡고 긴 터널의 막바지에서 5만달러의 체감적 가치는 예전 호황 때의 50만달러와 같은 느낌이었다. 강도들에게 그냥 다 주고 내리고 싶어도 선뜻 내주기 어려운 막대한 금액이었다.
설상가상 50장의 여행자 수표는 싸인이 되지 않은 백지 상태였고 따라서 분실되었을 경우 발행기관의 보호를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다.
A사장의 실력을 믿고 시작한 그 비좁은 차 안에서의 격투는 종료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소 듣던 대로라면 이미 그의 주먹이 강도들의 얼굴을 강타하고 있어야 했는데 A사장은 유연하게도 양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말 그대로 나 혼자서만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실 강도들이 별 무기도 없이 무모하게 맨몸으로 강도질을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A사장이 몸을 숙여 그 위로 공간이 생기자 그 옆의 강도는 칼로 내 오른쪽 무릎 옆 부분을 그대로 쑤셔댔다. 칼 솜씨가 시원치 않은 듯 지나던 차의 불빛에 언뜻 비친 예리한 칼끝은 겨우 5cm 정도 들어간 것 같았고 신기하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거의 동시에 왼쪽 옆구리에는 극심한 통증이 감지되었다.
아마 칼로 담궜으면 어렵지 않게 저 세상으로 떠났을 것인데 내 왼쪽의 강도는 칼 대신 커다란 공업용 드라이버를 사용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강도는 장비가 매우 열악했다. 날이 무딘 공업용 드라이버는 내게 심한 통증만 유발하는데 그쳤다.
순간 강도들이 휴대한 무기가 별것 아니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얌전히 엎드려 있던 A사장에게 그 옆의 칼 좀 제압하라고 절규하는 순간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동시에 들렸다.
내 머리 윗부분에 심한 충격이 느껴졌는데 이 역시 이상하게도 전혀 통증이 없었다. 아마도 나는 두부에 총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강도들이 칼이나 드라이버만으로 무장했다고 단정 지은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짙은 어둠이 내 시야의 모든 사물을 은폐했을 것임에도 조금 전 나에게 물리적 위해를 가한 칼과 드라이버만이 전부라고 생각한 것은 아마도 상황이 너무 급박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 판단착오로 나는 돈도 털리고 내 목숨도 스스로 풍전등화의 벼랑 끝으로 내몬 격이 되었다. 조수석 공간에 앉아 우리를 향해 있던 덩치 큰 강도는 알고 보니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앞에서 진행 황을 지켜보다가 내가 제압되지 앉자 마침내 그가 나선 것이었다.
머리에 심한 충격이 가해졌음에도 나의 의식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최소한 총상은 아니었음을 직감했으나 암흑 속에서 두어 차례 더 머리에 가해진 가격은 피할 길이 없었다. 그 이후 나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다.
거구의 강도는 권총을 발사하는 대신 그나마 다행히도 총신을 거머쥐고는 철제 권총 손잡이로 나의 머리 부분을 힘껏 내려친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요즘 강도를 당하지 않고 그때 당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것도 천운이었다. 요즘의 강도는 일단 먼저 쏘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나마도 그때는 멕시코 치안부재의 초창기라 강도들도 웬만하면 사람의 목숨은 거두지 않으면서 나름의 영업을 하고 있었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몇번의 가격으로 출혈이 급격히 심해졌다. 끈적하고 뜨거운 액체가 얼굴 전체를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리면서 어느 순간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해도, 흐려져 가는 의식의 끈을 잡으려 부단히 애를 썼어도 나는 서서히 죽어가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와이셔츠가 무자비하게 피에 젖어 아주 불쾌하다는 느낌이 뜬금없이 들었다. 어렸을 때 야뇨증으로 이부자리를 흥건히 적셨던 그 척척한 불쾌함이 오버랩 되었다. 어느 거리를 지나고 있는지 교차하는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빈번해 지고 있었다.
그 순간적 불빛들에 반사되어 내 지갑을 열고 환호하는 한 강도의 얼굴이, 고고장 사이키 조명 아래 흔들거리는 군상들 중 하나처럼 보였다.
이상하게도 공포가 사라지면서 마음이 아주 편안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주위의 모든 움직임이 슬로모션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택시의 엔진소리도 꼭 슬로우 모션 영상처럼 길게 늘어지기 시작하였다.
사람이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이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죽는 중인지도 몰랐다. 강도들이 나를 어느 길바닥에 내다 버리면서 나의 가물가물한 의식도 함께 사라졌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