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최무룡’ 구광렬 “마지막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최무룡

어머닌, 사진만 보고 결혼하셨다
시집이라고 와보니 솥엔 구멍이 나 있고
양은 주걱은 닳아 자루까지 닿았으며
숟가락은 없고, 나뭇가지를 분질러 만든
짝 모를 젓가락들만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장사 밑천을 꿔보려 친정을 찾았다
출가외인이라는 말 한 마디에
돌아오는 그림자에 숭숭 바람이 빠졌으나
그즈음 아버진,
쌈짓돈까지 투전판에서 날리고 있었다

똥장군도 지시고 식모살이도 하시고
팔도를 돌며 봇짐장수도 하셨는데,
들어오는 돈만큼이나 자식들이 나왔다
뒷간에서 힘을 주시다가 만삭인 몸에서
툭! 애기가 떨어지기도 했다
내 나이 예닐곱쯤이었다

아버지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바람이란 본시 오래 머물지 않고 휘리릭 스쳐가건만
당신의 바람은 무에 든 바람처럼
한없이 칼로 도려내야 할 심지 있는 것이었다

어는 보름, 그냥 보름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번 우리 어머니 시장이 쉬던 보름,
극장엘 갔다

어른 영화를 칭얼대지 않고 봐줘서인지
점심으로 내가 좋아하는 자장면을 사주셨다
난 군만두까지 사주신다면
한 프로를 더 봐줄 수 있다 했다

우린 손을 잡고 길 건너 또 다른 극장엘 갔다
그날 당신께선 그 옛날,
중신애비가 건네주던 남정네 사진들을 들여다보듯
세 편의 영화를 보셨다. 김승호, 김진규, 최무룡……

돌아오던 길,
마지막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들녘은 곱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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