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양들의 사령관’ 박노해

푸른 초장에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떼

에티오피아의 9살 소녀 수잔나는
맨발에 둘라 하나로 고원을 지휘하는 듯
포스 넘치는 양들의 사령관이다

수잔나, 네 양들이 몇 마리니?
글쎄요. 아마 50마리쯤…
학교를 다니지 못해 수잔나는
자기 양들의 숫자도 모르나 보다 했더니

근데 이 양은 지금 발목이 다쳐 아프구요
이 양은 새끼를 배어 있는 중이구요
이 양은 하루에 두 양푼씩 젖을 주는 양이구요
이 귀여운 점박이 양은 난지 한 달 됐구요
얘는 말썽꾸러기 녀석이에요
수잔나는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쓰다듬으며
자랑스럽게 나에게 소개해준다

아 숫자가 무슨 소용인가
사물의 질적 차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숫자가 무슨 소용인가

얼굴 없는 숫자는 죄악이다
숫자가 압도한 삶은 죽음이다
숫자가 지배한 사회는 죽은 세상이다
순전히 양적인 소유의 집착은
정말로 중요한 삶의 질을 추락시킨다

떨어진 옷자락을 날리며
양들을 몰고 가는 아홉 살 맨발의 수잔나는
진실로 양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위엄 있는 양들의 사령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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