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택시강도①] 치안 불안, 날마다 사선 넘어야

멕시코 거리를 운행하는 택시들.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으나 평범해 보이는 이들 택시를 모는 기사들이 강도로 돌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총부터 쏴 위해를 가하곤 한다. 

“‘불안전 지대’. 멕시코에서 예전엔 웬만하면 금전만 갈취하고 위해는 가하지 않았다. 요새는 총부터 쏘고 본다. 교민 한분은 얼굴에 총을 맞아 광대며 치아, 턱 한쪽이 거의 날아가 여전히 엄청 고생 중이다. 얼마 전엔 또 다른 교민이 우리 회사 인근 도로에서 총격을 당해 허벅지를 관통했다고 한다. 다행히 두 사람 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데 거동은 얼마나 불편할 것인가? 20여년 전 필자가 직접 체험한 택시강도사건을 소개한다. 그나마 요즘 상황에 비하면 천만 다행이었다.” 멕시코에서 특수화물운송회사 판트란스를 경영하는 홍금표 대표의 경험담입니다. 1968년 올림픽, 1970년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의 일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멕시코 역사의 수레바퀴는 뒷걸음질을 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시아엔>은 홍금표 판트란스 대표의 체험적 현지소식을 전합니다. <편집자> 

[아시아엔=홍금표 멕시코 판트란스 대표] 택시는 멈춰 섰고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리며 3명의 거한이 밀려 들어 왔다. 강도였다. 말로만 듣던 이른바 택시강도였다. 한 강도는 체격이 산만했고 둘은 그보다 좀 작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좁은 BOCHO 뒷 좌석에 A사장과 나를 가운데로 하고 강도 둘이 좌우로 꽉 끼어 앉아 있었다. 산만한 세번째 강도는 조수석을 이미 떼어낸 차 바닥에서 우리를 마주보며 쭈그리고 앉아있는 자세였다.

BOCHO는 폭스바겐 방게차의 애칭으로 한동안 멕시코에서 택시로 많이 사용되었다. 연비의 경제성과 단순한 공랭식 엔진 장착으로 고장도 별로 없고 수리비용 또한 저렴하여 택시 전용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다만 문짝이 좌우 합계 둘뿐이라 2인 이상의 승객이 탑승하려면 조수석 의자를 앞으로 밀고 등받이 역시 앞으로 제친 다음 몸을 한참 구부려 타야하는 불편함이 최대의 단점이었다.

그래서 거의 모든 BOCHO 택시는 조수석 의자를 뜯어낸 채 뒷좌석만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이 차종은 일반 택시용으로만 인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택시강도들의 전용 차량으로 절대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 BOCHO는 승객들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조수석쪽 단 하나였으므로 이 문만 봉쇄하면 사실 강도를 만난 승객이 차밖으로 몸을 날려 도망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물론 택시를 모는 운전자 역시 강도라 그로부터의 도움 또한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한동안 멕시코시티에는 BOCHO를 이용한 택시강도의 전성기가 있었다.

1997년경 멕시코는 이제 막 IMF에서 탈출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빈부 차가 극심한 이 나라에서는 IMF의 짧지 않은 터널을 지나며 서민들의 삶은 한층 더 피폐해져 있었다.

도처에 생계형 강도와 도둑이 들끓었고 대부분의 우리 회사의 멕시코 직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강도를 당하고 있었다. 한 여직원은 가진 돈이 없다는 이유로 버스 안에서 강도들에게 두들겨 맞아 울면서 출근하기도 했다.

퇴근길에 한 남자직원은 노상강도들이 몇푼 되지 않는 돈을 빼앗은 후 뒤 쫒아오지 못하게 바지까지 벗겨간 일도 있었다. 한국 직원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출퇴근 택시 안에서, 심지어는 백주대낮에 일반도로에서도 강도를 당하곤 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큰 상처를 입은 직원들은 없었다는 점이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손님 수십명이 들이닥친 무장 강도들에게 단체로 털리는가 하면 월급날에는 회사에까지 침입한 강도들이 전 직원을 묶어 놓고 여유롭게 준비된 현금과 필요한 집기를 털어가기도 했다. 만만한 단독주택은 도둑들이 아예 트럭을 대놓고 이사하듯 통째로 털어갔다.

아파트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경비원이 도둑들에게 매수되어 집 주인이 부재한 호수만 선별하여 아주 쉽게 가구와 패물을 싹 쓸어 가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어느 날 잠시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주택과 아파트의 거주자들은 집안이 텅 빈 것을 보고 혹 잘못 들어왔나 하고 다시 외부로 나가 주소와 호수를 확인까지 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실제로 있었다. 그만큼 멕시코시티의 치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 주차장에서의 납치도 성행했는데 주말보다는 주로 부녀자들끼리만 다니는 주중에 많이 발생했다. 아무래도 동행한 남성이 없는 편이 납치하기가 더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그래도 납치범죄의 초창기라 흥정한 몸값만 지불하면 살려서 풀어 주는 일이 많았다.

한편 대중교통 수단의 경우, 탑승인원이 적어 통제와 제압이 비교적 수월한 마이크로버스가 많이 털렸다. 그럼에도 생계형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아 강도질이 서툴다 보니 오히려 털다가 붙들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총을 몰래 소지한 승객에게 피격되어 그 자리에서 절명하는 경우도 종종 뉴스 한 부분을 차지하고는 했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날부터 택시강도 사건이 부쩍 많아지고 있었다. 택시강도는 일단 내부사정 은폐가 용이한 야밤에 주로 발생했고 택시기사는 승객을 태운 후 바로 인근의 일당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강도질을 하곤 했었다.

버스승객보다는 택시승객을 터는 것이 강도들에게 안전성과 경제성이 훨씬 더 보장되다 보니 이 강도택시의 숫자는 그 당시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돌아다니는 5대 중 1대는 강도택시라고 할 정도로 거의 치안부재에 준하는 상황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모든 게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강도들도 사람을 봐가며 강도질을 하는 모양인지 그 당시 나는 아무리 강도당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다녔어도 강도의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왜 쓸데없이 강도나 당하고 다니는 것인지 참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A 사장이 멕시코에 출장을 왔다. A사장은 그 당시 나에게 원단을 공급하고 있었다. 원단 제조업체였던 M실업에서 과장으로 일할 때부터 알게 된 인연이 벌써 1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즈음 A사장은 이미 독립해 자신의 원단 사업체를 활발히 키워가고 있었다. 나 역시 잡화를 하다가 한번 말아 먹고 난 다음 1990년대 초반 원단 오퍼를 시작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매출이 늘어나고 있었다.

멕시코 지방 도시를 비롯해 중미쪽에서도 다양한 원단 인콰이어리(가격이나 물품인도 조건 문의)가 답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사업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 무렵의 나는 늘 무언가 남다른 경쟁력 확보에 목말라 있었다. 사실 오퍼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해서 같은 업종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프린트 디자인에서 발군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도입한 캐드 시스템은 원단에 적용할 프린트 디자인과 다양한 컬러웨이를 대량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지고 수정된 수많은 디자인은 바이어가 원하는 원단에 프린트되어 한동안 멕시코 전역에 뿌려졌다.

디자인의 강점을 바탕으로 우리 회사는 비교적 고가이며 다품종의 원단을 연평균 1500만달러 정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단순히 중계만 하는 오퍼상이 아니고 디자인 전문이라는 자부심에도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던 1994년 말 바야흐로 멕시코가 IMF 직격탄을 맞았다. 하루 아침에 페소화는 폭락하여 향후의 멕시코 경제는 가늠할 수 없게 되었고 수입 오퍼 가격도 덩달아 폭등하여 거의 2년 동안 개점 휴업상태에 들어갔었다. 겨울철 곰처럼 완전 동면상태는 아니었어도 회사 몸집을 최대한 줄이고 간신히 숨만 쉬면서 바깥 날씨가 조금이라도 풀리길 학수고대하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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