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경주 다시 들여다보니···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신라의 서라벌이 7세기에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사라센의 바그다드, 중국의 장안과 더불어 세계 4대도시의 하나였다고 한다.
우리말인 서울이 서라벌에서 왔는데 서라벌(徐羅伐)은 서울을 이두(吏讀)로 표기한 것이다. 서라벌은 단지 경주 한 수도가 아니라 신라를 통칭하였을 것이다. 인구가 백만에 달했다고 하는데 통일신라 때일 것이다. 고대국가에서 인구는 바로 국력이었는데 토지 생산력, 군사력과 직결됐다. 서라벌은 당시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다.
한반도에서 세계의 한 중심이 되었던 적은 그 밖에는 거의 없다. 고려의 개경이 컸다 하나 동아시아에는 그밖에도 큰 도시가 많았다. 중국 문물이 가장 번성한 당송(唐宋) 시대에 항주 소주(杭州 紹州)는 개경의 류가 아니었다. 이 당시의 번영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중국 문물을 도입하는 견당사는 일본에서 당으로 4회 오갔다. 그러나 일본에서 서라벌에 23회, 신라에서 일본으로 39회 오가서 신라가 일본에 중국이나 서역 문물을 전하는 주된 역할을 하였다.
그 시대 일본의 고승 원인(圓仁)의 <구법입당순례여행기>(求法入唐巡禮旅行記)는 청해진에 기지를 둔 장보고가 신라, 일본, 중국의 해상교역을 지배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의 장안이 세계의 중심이었다. 서라벌은 왕궁과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한 시가지를 장안을 본받아서 만들었다. 일본의 도시 나라도 이와 같았다. 그래서 경주의 모습은 최근에 발견된 유적, 유물로 다시 그려야 한다. 1920년대, 1930년대에 형성된 경주 시가는 1980년대, 1990년대에 발굴된 유물 유적으로 다시 그려야 한다는 얘기다.
석굴암도 천년동안 가려 있다가 1920년대에 비로소 발굴되어 현진건에 의해 <고도순례 경주>에 절묘한 필치로 묘사되었다. 경주 천년수도를 기념하는 축제가 수년 전 개최된 바 있다.
오늘의 서울은 1천만 도시다. 경기도를 포함하면 2천만이 넘는다. 엄연한 메트로폴리스, 초거대도시다. 아시아에서는 도쿄와 상하이 정도가 비길 수 있다. 중국의 고대를 볼 수 있는 서안(西安), 현재를 볼 수 있는 베이징(北京), 미래를 보는 상하이(上海)를 합한 것과 같다.
한양(漢陽)으로부터 시작하면 정도(定都) 6백년으로 유물, 유적도 많다. 한강과 같은 큰 강, 북한산과 같은 높은 산이 있는 수도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지하철 운임이 1달러 남짓이면 어디나 간다. 치안도 다른 도시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전하다. 강화에 지하철이 연결되면 전등사도 지척이며, 양평의 두물머리와 천년고찰 용문사도 중앙선으로 한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