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 백제역사’, 공주·부여 외에 익산도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수리 전후 모습. 백제사를 보다 완결시키려면 고대 익산 연구가 필수불가결하다.  <사진 연합, 문화재청 제공>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백제 역사는 거의 사각지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백제 자신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승자에 의해 쓰여진 것은 왜곡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 백제와 관련해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접근이 제한되었던 황실 유물창고 정창원에 있는 물류 끄트머리에 의해 상당한 것이 밝혀지고 있다.

신라와 일본 사이에 교역이 상당했다. 신라가 페르시아 제품이 아닌 스스로 제작한 양탄자도 사용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왜(倭)가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쓰기 시작한 것이 670년이다. 일본은 견당사(遣唐使)를 통해 문물을 받아들인 것으로 기술하나, 한반도를 통해 중국과 서역 문화를 일층 정련된 문화로 받아들인 것이다.

역사 연구에 있어 지금까지 관심의 차이, 연구인력의 차이는 극복할 수 있다. 더구나 개발되지 않은 자료가 많다는 것은 다행이다. 이는 연구자료나 방법론에 있어 새로운 기여가 있어야 하는 박사논문 자료로 특히 유리하다.

기득권 위주로 편향된 학계의 인적 구성도 개선될 수 있다. 외국에서의 연구도 자극이 된다. 발해사 연구를 위해 러시아 학자의 연구가 활발하다. 이는 1990년 소련이 무너지기 전까지 외부에 개방되지 않았다. 중국에서의 한반도 기술에 가야는 아예 빠져 있다.

당은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렀다. 발해는 일본과 해상 교류가 성했는데 남아 있는 자료가 의외로 많다. 당은 고구려와 수십 년 쟁패해서 중국에는 고구려와 관련된 민간설화가 전승되는 것이 많다. <조선왕조실록> 연구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나, 오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아야 한다.

백제 연구를 위해 부여 이외에 익산의 연구가 합쳐야 한다. 익산 미륵사지 발굴은 아직 진행 중에 있다. 백년 전인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설립된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주로 의지하나, 백년은 매우 긴 시간이다. 지금까지 부여와 공주는 백제 연구의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위례 백제는 지금 진행 중에 있다. 백제 역사는 1980년대 이후 비로소 개척된 것이 많다.

익산은 번성하던 제30대 무왕 시절의 백제다. 성왕은 신라와 같이 한강 유역을 개척하다가 진흥왕의 배신으로 상실하고 분노 끝에 싸우다가 전사했다. 성왕의 손자인 무왕이 복수를 위해 신라 진공에 유리한 익산에 천도할 준비를 했다는 추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무왕이라는 시호가 자주 쓰는 시호가 아니다.

익산 미륵사는 불탑 셋과 금당 셋을 갖춘 동양최대의 대규모 사찰이었다는 것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유물에 의해 새록새록 밝혀지고 있다. 미륵사는 신라 최대의 황룡사를 분명히 능가한다. 현재도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미륵사지는 가로x세로 500m씩이다. 무왕은 36년에 걸쳐 미륵사를 이루었다고 한다. 익산박물관은 부여박물관과 합쳐서 보아야 한다.

발해 역사는 고구려의 만주 경영을 밝혀준다. 해방 전 신라 위주로 진행되던 연구와 고구려가 번성했던 북한에서의 연구도 합쳐야 한다. 익산 미륵사지는 그래서 꼭 가볼만한 곳이다.

백제 역사는 이제 밝혀지고 있는 초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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