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정말 그럴 때가’ 이어령 “어디가나 벽이고…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거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 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지 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지금 모두 다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