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바로 알기④] ‘화산이씨’ 어제와 오늘…베트남 ‘리 왕조’가 뿌리
[아시아엔=심형철 <아시아엔> 칼럼니스트 외] 오늘날 우리나라는 베트남과 경제적·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베트남과 교류를 해왔을까?
역사를 살펴보면, 뜻밖에도 두 나라 관계가 매우 오래전부터 가까웠음을 알게 된다. 안남국(安南國, 중국 당나라가 하노이에 설치한 안남도호부에 유래한 나라 이름으로, 현재의 베트남 북부에서 중부를 가리키는 지리적 명칭)의 리 왕조(1009~1226)는 중국의 책봉 체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국왕을 결정한 최초의 베트남 왕조다.
그런데 7대 왕인 리롱깐(李龍幹)이 병약하여 일찍 사망하자 1213년 리삼(李?)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신하들에게 국정을 맡겼는데, 당시 지방 호족으로서 정계 실력자로 부상한 쩐(陳)씨 가문은 왕의 딸인 찌에우타인 공주(소성공주)를 며느리로 맞음으로써 더욱 막강한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권세가 하늘을 찌른 쩐씨 가문은 결국 리삼을 협박하여 왕위를 찌에우타인 공주에게 넘기도록 했고, 찌에우타인 공주는 남편인 쩐씨에게 다시 왕위를 넘김으로써 리씨 왕조는 멸망하고 쩐씨 왕조인 다이비엣국(대월국)이 들어섰다.
이때 리씨 왕조의 6대 왕 리티엔또(李天祚)의 일곱째 아들인 이용상(李龍祥, 베트남 이름은 리롱뜨엉)은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1226년 다이비엣국을 탈출하여 송나라를 거쳐 고려로 향했다. 그는 황해를 건너 옹진반도로 항해하다가 고려인을 잡아가는 해적을 발견하고 그들을 구해 주었는데, 이 일로 옹진 현령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옹진 현령은 멀리서 온 안남국의 황손이 도적을 퇴치했다는 상소문을 임금인 고종에게 올렸다.
고종은 안남국의 왕족인 이용상에게 식읍을 하사하고, 그가 정착한 곳인 화산(현재 황해도 옹진군)을 붙여 그를 화산군으로 봉했다. 이로써 이용상은 우리나라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1253년 12월 이용상이 살던 화산에 몽골군이 쳐들어왔다. 그는 옹진성에 토성과 목책으로 방벽을 쌓고 몽골군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냈다. 이 공로로 고종으로부터 관직과 함께 화산 인근 30리와 식읍 2천호를 하사받았다. 또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제수는 물론 그가 지내던 곳인 화산관에 ‘수항문(受降門)’이란 임금의 친필도 받았다.
그의 맏아들 이간은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고, 둘째 아들 이일청은 안동부사를 지내고 부임지인 안동군 내성면 토곡리에 정착했다. 그 후 이곳은 화산 이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한편 이용상은 말년에 망국단을 세우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한다.
고려시대 외적의 침입에 맞서 이국땅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용상의 기개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온 나라가 왜구의 침략으로 짓밟히던 임진왜란 당시 이용상의 13대 후손인 이장발(1574-1592)은 겨우 18세 어린 나이였지만 기꺼이 의병이 되어 문경새재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숨졌다. 이장발이 전사하기 전에 쓴 시가 현재까지 전해온다. 이 순절시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에 그를 기리는 사당인 충효당의 벽면과 네 기둥에 걸려 있다.
백년 사직을 보전할 생각으로(百年存社計)
6월에 (왜적과 싸우기 위해) 갑옷을 입었네(六月着戎衣)
애국하는 마음으로 몸은 죽지만(憂國身空死)
부모님이 그리워 혼만 돌아가네(思親魂獨歸)
특히 충효당의 마루에 올라서면 벽면 상단에 만들어놓은 연꽃 문양을 볼 수 있다. 사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다. 당시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 가장 유교적인 색채가 강한 사당을 지을 때 불교와 관련이 깊은 연꽃을 벽면에 새겼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 이유는 연꽃이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기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 아닐까? 조상을 기리고,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자 하는 애절한 마음의 표현이 깃든 것 같아 예사롭지 않다.
이용상은 고국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낯선 이방국인 고려를, 그의 후손 이장발은 조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고려와 조선도 이들의 충성심과 기개를 기려 큰 상을 내리고 사당을 세웠다. 이들의 아름다운 선린정신이 오늘날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밀접한 관계를 맺는 데 굳건한 기반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현재 국내의 화산 이씨는 약 1300명이라고 한다. 봉화군은 리 왕조 사원이 있는 베트남 박닌성 뜨선시와 교류하고 있다. 베트남의 리 왕조 사원에서는 해마다 기념행사가 열리고 화산 이씨 후손들도 참석한다. 화산 이씨와 충효당에 대한 베트남의 관심도 각별하다. 1995년 화산 이씨 후손들이 베트남을 찾았을 때, 왕손에 대한 예우로 공산당 서기장까지 나서서 환영했다. 2016년에는 주한 베트남 대사가 충효당을 찾았고, 베트남 언론의 충효당과 봉화군의 리 왕조 후손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최근에는 봉화군이 베트남과의 문화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충효당 중심의 베트남 타운 조성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충효당 일대에는 베트남 역사공원을, 가까이 있는 창평저수지 부근에는 숙박과 교육 시설을 갖춘 베트남 마을을 조성할 예정이나 예산 확보가 잘 되지 않아 진척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 밖에 근대 이전의 역사 속에서 우리나라와 베트남이 교류한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18세기 조선의 실학자인 정동유(1744∼1808)는 베트남에 표류했던 고영상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베트남 표류기를 썼다. 고영상은 제주도 사람으로, 1687년 동료 어부 23명과 함께 진상품을 배에 싣고 항해하다가 추자도 근처에서 태풍을 만나 표류 끝에 3명이 죽고 한 달 만에 베트남 해안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약 1년간 지낸 뒤 1688년 8월 7일 베트남을 출발하여 중국을 거쳐 12월 16일에 마침내 제주도로 돌아왔다. 정동유는 이들이 베트남에서 본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매우 상세하게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중에 재미있는 내용을 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안남국은 토지가 비옥하고 논이 많다. 사람들은 보통 자식을 7, 8명 두었다. 사계절이 항상 따뜻하여 한 해에 누에는 다섯 번 치고, 벼농사는 세 번 한다. 굶주림과 추위에 대한 걱정이 없다. 원숭이는 고양이만 한데 말귀를 잘 알아들어 심부름도 한다. 코끼리 상아는 한 길 남짓하고, 몸집은 집채만 해 코끼리를 목욕시키려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갔다. 코끼리 털은 청회색이고 매우 짧으며 머리에 갈기가 없고 꼬리에도 털이 없다. 코는 길이가 길고 손처럼 사용한다. 공작새는 학에 비해 몸집이 매우 크고 온몸의 깃털이 오색 찬란하다. 꽁지깃은 두어 자 남짓이고 끝에는 엽전처럼 생긴 무늬가 있는데 붉고 푸른빛이 비단보다 훨씬 더 곱다. 파초는 매우 크다. 잎의 길이가 길고 크며 밑동은 기둥과 같다. 코끼리가 잘 먹는데 마치 말이 마른 풀을 먹는 듯하다. 종려나무(야자수) 열매 크기는 사발만 한데 겉껍질은 매우 단단하고, 속에 물이 한 되쯤 들어 있는데 그 맛이 달다. 안남 사람들은 정신과 기운이 피곤할 때 빈랑을 먹는다.
이 글을 읽어보면, 지금 우리가 베트남을 다녀와서 쓴 것처럼 생생한 정보가 가득하다. 베트남에 대한 안내서로 충분할 정도로 서술되어 있다. 이들은 베트남을 떠나올 때, 자기들을 돌려 보내주는 대가로 쌀을 주기로 약속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숙종실록’ 숙종 15년 2월 13일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주 사람 김태황이 정묘년(1687) 9월 목사 이상전이 진상하는 말을 배에 싣고 가다가 추자도 앞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31일 만에 안남국 회안(호이안)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안남 국왕이 임시로 건물을 지어 제공하고, 식량을 주어 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무진년(1688) 7월, 중국 절강의 상선을 타고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안남국에서 가져온 공문은 그 나라의 관리가 작성한 것인데, (공문을 나타내는) 도장이 찍히지 않았습니다. 절강의 상선은 중국 영파부(寧波府)의 공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태황이 중국 배를 탈 때에 쌀 600자루를 주기로 약속했는데, 김태황이 갚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나라에서 갚아줌이 마땅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을 현대어로 수정함
당시 베트남 왕국은 먼 나라에서 온 20여명의 표류민을 따뜻하게 맞아들여서 1년 가까이 돌봐준 것은 물론이고, 마침내 이들을 고향으로 돌려 보내주었다는 사실도 잘 드러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이미 800년 전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