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외도’···이비인후과 전문의 정태기 “나누면 가슴이 뛰짢아요”

진료는 목숨을 질병을 치료하며 목숨을 구하고, 교육은 삶의 방식을 스스로 찾게 돕는다. 네팔 어린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안경 쓴 이가 정태기 지구촌나눔교육 대표

김해서울이비인후과·독립바이오제약·지구촌나눔교육 시간·공간·사람·일에 온몸 사르는 ‘뼛속까지 의사’

[아시아엔=김남주 <서울대총동창신문> 기자] 설 연휴 직후인 지난 1월 29일 KTX를 타고 경남 창원에 내려갔다. 최근 서울대의대동창회가 선정·시상하는 ‘장기려醫道償’을 받은 정태기 김해서울이비인후과병원 대표원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2004년 제정된 장기려의도상은 장기려 박사와 같은 삶을 이어받아 의사의 도리를 널리 일깨워 준 서울대의대 출신 의사들을 격려하는 상이다. 김인권 여수애양병원 원장이 제1회 수상자다.

경상권 일대에서 ‘편도왕’으로 불리는 정 대표원장은 2011년 사단법인 지구촌교육나눔을 설립해 네팔 오지에 학교를 짓는 교육나눔 활동을 해왔다. 그동안 12개의 학교를 세웠다. 글로벌교육 나눔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후원사 역할을 할 독립바이오제약사도 설립했다. 지역 예술인들을 위한 후원활동도 활발하다. 사비를 털어 병원 내에 평화의소녀상까지 세웠다. 병원, 봉사단체, 제약사를 운영하며 바쁜 삶을 살아내는 그를 1월 29일 저녁 7시 창원 상남동 한 식당에서 만났다. 병원은 김해, 제약사는 경기 판교, 숙소를 겸한 사단법인은 창원에 있다고 한다.

-환갑을 지난 것으로 아는데, 너무 많은 일을 하고 계신 거 아닌가요. 몇 시간 주무세요?
“4, 5시간 잡니다. 일이 재미있으니까 힘들다는 생각은 안 해요.”

-댁은 어디세요?
“경기도 분당입니다. 방학에는 병원 일이 많아서 주말에 올라가 월요일 판교에 있는 제약사 일 보고 내려옵니다. 회사가 점점 커지니까 3월부터는 일주일에 3일 정도는 판교에서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독립바이오제약과 코메인 합병 조인식 후. 왼쪽부터 네번째 정태기 대표

-제약사는 몇 년 됐죠?
“7년 됐어요. 고생 많이 했습니다. 아직 매출이 많지 않아 적자입니다. 제네릭 약품을 주로 생산하는데 올해부터는 신약개발도 하려고 합니다.”

-병원 운영도 쉽지 않을 텐데 사단법인에 제약사까지 벅차지 않으세요? 제약사 설립 배경이 궁금하네요.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앞으로 내 세대에서 끝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속적으로 하려면 뭔가 든든한 후원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제약사가 후원자 역할을 하는 거네요.
“그렇죠. 직원 워크숍 때 ‘우리 회사는 나누기 위해 만든 회사’라고 했어요. 수익이 목표가 아니고. 직원, 주주, 사회와 나누는 것이 회사설립 목적입니다. 제가 죽을 때 주식은 ‘지구촌교육나눔’에 주고 간다고 밝혔어요. 나눔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요.”

-의사가 다른 직업군에 비해 봉사할 기회가 많죠. 네팔 봉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죠?
“제가 진주와 마산의 중간인 진양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깡촌이었죠. 지금은 진주로 편입됐고요. 전깃불도 안 들어오는 시골에서 어렵게 살았지만, 부모님이 교육열이 높으셨어요. 그 덕분에 지금 이만큼 살 수 있었고요. 때가 되면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 김경현 화백을 통해 네팔과 인연을 맺었어요. 그분이 그림 등을 팔아 네팔을 돕고 있었어요. 현지에서 학교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저에게 전하면서 함께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2010년 중3 아들을 데리고 네팔에 가서 보니 정말 환경이 열악하더군요. 교육봉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제대로 하자는 생각에 사단법인 지구촌교육나눔을 설립했습니다.”

-흔히 하는 의료봉사로 시작된 게 아니네요.
“의료봉사는 1회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스스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교육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공부할 공간이 시급해 보여 학교 짓는 활동을 주로 해왔습니다. 네팔 처음 가서 마주친 게 현대 차, 삼성·LG 가전제품입니다. 누구는 물건을 팔지만 이런 도와주는 활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더욱이 처음 만난 마을 주민들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어요. ‘네팔 노동자들이 너희 나라에서 폭행당하고 대우가 형편없다는 데 왜 그런 거냐’ 그런 질문을 던지는 분도 계셨어요.”

-주로 어느 지역에 학교를 지어줬나요?
“카트만두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헤타우다라는 도시입니다. 네팔은 산이 많고 그곳도 해발 1900m 고지를 넘어가야 돼 접근이 쉽지는 않습니다. 공사가 중단된 학교를 마무리짓기 시작해 지금까지 12개 학교를 건립했습니다.”

50대 중반에 독립바이오제약 건립

-여러 국제구호단체에서 이런 일을 많이 할 텐데, 작은 단체에서 계속하는 이유가 있으세요.
“내부에서도 그런 말을 해요. 우리는 도서관이나 지어주는 게 어떠냐고.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국제단체들도 접근하지 못하는 열악한 곳이 여전히 많아요. 갈 때마다 보여요. 더 험한 곳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에는 형제들과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지난해 돌아가신 어머니 이름으로 기숙사도 지었어요. 초기에는 사비가 많이 들어갔는데 최근에는 혜성DS, 성운치과 등 이 지역 업체들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 할 만합니다.”

-학교 한 채를 짓는 데 얼마나 드나요?
“2015년 네팔에서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3000만원이면 8개 교실이 있는 학교를 지을 수 있었는데 이후부터 내진설계 비용이 들어가 4000만~5000만원으로 건축비가 올랐어요. 건축비용의 80%를 지원해요. 20%는 그 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을 청하죠. 노동력 등으로요. 그래야 애정이 더 생기니까요.”

정태기 대표원장은 앞으로 건물 등 하드웨어보다 교육프로그램 지원에 힘을 쏟을 생각이다.

“3년 전인가, 부탄 왕실의 초대를 받아 부탄에 간 적이 있습니다. 행복한 나라로 알려졌지만 이데올로기 주입으로 그렇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환경이 열악해요. 의학교가 없어서 스리랑카, 인도 등으로 위탁교육을 보내요. 이 아이들 교육을 우리가 맡아 볼까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온라인으로도 교육이 가능하잖아요? 실습할 장소만 마련하고요. 부탄, 네팔을 비롯해 방글라데시, 시에라리온 등 열악한 나라의 의학교육을 지원해야겠다는 계획이 있어요. 주변에 도와줄 지인들이 있어서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공보의 시절 대한공중보건의협의회 세워

-이런 일이 재미있으세요?
“그럼요. 가슴 뛰는 일이니까.”

-가족들은 뭐라고 하세요?
“아내는 월급도 제대로 안 갖다 주니까 그만 일 벌였으면 하는 눈치죠. 그런데 ‘장기려의도상’ 받으니까 아내가 가장 좋아하더라고요.”

-장기려의도상 상금 전액을 지구촌교육나눔에 기부하셨던데.
“사실 그 상이 저에게 과분하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고사했는데, 상금이 좀 필요했어요. 2000만원이거든요. 법인 잔고가 3500만원 쌓여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최근 IT업체도 인수하셨죠.
“메디컬 분야에서 제약을 기본으로 빅데이터를 활용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비즈니스를 계획하고 있어요. 기본은 전자차트입니다. 무인 접수, 무인 수납 등 사람의 손을 거지치 않도록 하고, 사물인터넷을 활용한 혈압, 심박수, 호흡수, 체온 등을 근거리 무선통신 등을 통해 전자차트 안에 연동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입니다. 계속 이러한 기업 인수합병을 통해 독립바이오제약의 덩치를 키워나갈 생각이에요. 20년 내에 세계 30대 제약사로 키우는 게 꿈입니다. 세계에서 백만장자를 가장 많이 만들어준 사람이 맥도날드를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회사로 키운 레이크룩이란 사람입니다. 그가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 게 54세에요.”

-확신이 있나요?
“그럼요. 꿈은 이루려고 꾸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으면 꾸지도 않죠.”

-치열하게 살고 계신데, 어려운 순간도 많았을 것 같아요.
“많았죠.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리려다 참고 돌아온 순간도 있었죠. 사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병원, 제약사 직원이 몇 명이죠? 월급날 되면 머리 아플 것 같은데.
“병원은 25명, 제약사는 44명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제약사 직원들 한때 다 내보낸 적도 있어요.”

-경남필하모닉오케스트라 창립, 와인아카데미 원장, 대한공중보건의협의회 초대회장, 뭔가 새로운 일을 끊임없이 만드는 스타일이신 것 같아요.
“지난호 서울대총동창신문에 이어령 선생님 인터뷰가 나왔던데 그분이 그런 분이잖아요. 끊임없이 공부하고 머물러 있지 않는 삶. 후배들에게 이정표가 되잖아요. 저도 후배들에게 좋은 이정표가 되고 싶죠.”

-여러 단체, 회사, 병원을 운영하다 보니 가장 중요한 게 뭔가요.
“근본을 잘 만들어야 해요. 멀리 가려면 천천히 가라고, 회칙, 정관, 규약 등을 꼼꼼하게 만들고 이행해야 합니다. 시스템이 중요해요. 기업을 만들 때도 주식회사로, 단체는 사단법인으로 먼저 틀을 만들고 시작합니다. 희생하는 리더십도 중요해요. 리더가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미래를 볼 수 있는 공부도 게을리하면 안 되고요.”

-강연 부탁도 많이 받으시죠? 무슨 메시지를 전하시는지.
“꿈꾸고 열정을 갖고 행하라는 이야기를 해요. ‘벽이 나타나면 눕히면 길이 되고 다리가 된다. 안 되면 돌아가면 된다.’”

정태기 김해서울이비인후과 원장 <사진 경남도민신문 김구연 기자>

-서울대의대 40회 동기회 회장도 맡고 계시다고요?
“네. 종신회장 하고 있습니다. 안철수가 동기예요.”

-동기들은 자주 보세요?
“요즘 우리 나이가 부모님 상이 많을 때잖아요? 동기들 간에 단체조문 시간이 있어요. 발인 전날 오후 8시 30분에 보통 20명 이상 모입니다. 자주 보게 되네요.”

-정작 원장님은 지난해 모친상과 자녀 결혼식 때 알리지 않으셨다고요.
“요즘 결혼식 문화가 바뀌고 있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고 그런 친구들이 많아요.”

-의대가 결속력이 강하죠?
“그렇죠. 대개 1학년 수석이 2학년 꼴찌보다 아는 게 적어요. 확실한 선후배 의식이 있어요. 지금도 1년 선배 만나면 ‘형님’ 그래요.”

-의대 지원 동기는 어떻게 되세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인상 깊게 봤어요. 정신과 병동 이야기죠. 법대 가려고 문과에 있었는데 이과로 옮기고 재수해서 의대 들어갔죠.”

-이비인후과 전문의가 되셨어요.
“의대에서 첫번째 실습이 정신과였어요. 국립정신병원을 갔는데 환자들 입원 기간이 20년, 30년 되는 거예요. ‘정신과가 아무것도 못 고치는구나, 의사가 병을 고쳐야 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이비인후과 공부를 하게 됐죠.”

-이비인후과의 ‘의원’이 아닌 ‘병원’이란 말이 낯선데요.
“경상권 첫 이비인후과 전문병원입니다. 지난해 수술 건수가 약 600건 됩니다.”

그의 네이버 블로그 ‘편도왕 정태기 박사(blog.naver.com/tgjung3043)’를 보면 만성비염, 편도염 등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던 어린 환자들의 감사 글이 많다. 경상권 일대에서 소문을 듣고 찾는 이가 많은 듯했다.

-병원이나 제약사에 지인들 청탁으로 들어온 직원이나 친척들은 없나요.
“늘 학연, 혈연, 지연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운영하는 곳에는 지인이나 친척이 없습니다. 여기서 새로 만나는 사람, 현재 이 순간 만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요.”

김해서울이비인후과병원에 평화의소녀상이 서있다. 왼쪽이 정태기 원장

경남 진양군(현 진주)에서 태어난 정 원장은 수원 수성고 졸업 후 서울대에 입학, 이비인후과 전문의가 됐다. 공중보건의 시절 허송세월만 보내는 공중보건의 시스템을 바로잡고자 대한공중보건의협의회를 결성했다.

2000년대 초 창원에 내려와 경상권 이비인후과 병원을 개원했다. 당시 새로운 형태의 내부 공간을 꾸며 지역 예술가들에게 갤러리로 제공하기도 했다. 현재는 김해로 옮겨 김해서울이비인후과병원을 운영 중이다.

2013년 마산합포구 가포동에 독립바이오제약을 설립해 20여 종류의 약을 생산·시판한다. 독립바이오제약 주주는 대부분 의사와 약사 등으로 현재 140여명이 있다. 지난해 IT업체인 코메인을 인수 합병해 바이오와 IT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현재는 경기도 판교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2011년 사단법인 지구촌나눔교육을 세워 네팔에 학교 지어주기 사업 등 글로벌 교육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경남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초대 이사장, 창원성산아트홀 운영위원, 경남메세나협회 감사, 합포문화동인회 운영위원 등을 맡아 지역 예술가 후원 활동도 왕성하다.

대학 시절 오케스트라 첼로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한때 와인 아카데미와 와인바도 운영했다. 서울대의대 40회 동기회 종신회장을 맡아 졸업 30주년인 2016년 ‘그때 연건동 28번지’라는 동기문집을 발간했다.(이 기사는 서울대총동창회가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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