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 “이제는 감염병 시대···뉴노멀 준비해야”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

“코로나19는 화롯불···계기되면 확 번질 것”
34세에 병원 이사장, 바이오 회사도 인수
신종플루 도전 경험으로 전염병 치료 선도

[아시아엔=편집국]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대한병원협회 코로나비상대응 실무단장은 코로나19 극복의 최전선에 나서고 있습니다. <아시아엔>은 서울대총동창회보의 이왕준 이사장 인터뷰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나비넥타이를 맬까요?” 이왕준 이사장은 인터뷰에 앞서 자신의 복장이 괜찮은지 물었다. 뜻을 몰라, “지금 괜찮은데, 오히려 이런 시국에 너무 꾸민 티가 나지 않을까요?” 그대로 하자고 했다. “사실은 우리 병원 공식 복장이 나비넥타이에 짧은 가운입니다. 세탁을 자주 않는 롱타이는 감염에 아주 취약하지요. 긴 가운도 그렇고요.”

2009년 신종플루 대처부터 최근 코로나19까지 최전선에서 감염을 막고 있는 명지병원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이왕준 이사장은 10년 전부터 질병관리본부의 감염병 전문가위원회 일원으로 활동하며 사스, 메르스 사태를 경험했다. 현재 대한병원협회 코로나19 비상대응 실무단장을 맡고 있으며, 코로나19 치료제·백신개발 범정부 지원단 방역물품·기기 분과장이기도 하다.

최근 페이스북에 올린 글 “이제는 감염병 시대의 ‘뉴노멀’을 준비해야 한다”는 ‘포스트 코로나’를 묻는 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터뷰는 4월 29일 경기 고양시 화정동 명지병원에서 진행됐다.

-정은경 질본 본부장 등 서울의대 83학번 활약이 대단합니다.
“메디포스트 양윤선 대표도 83학번이죠. 워낙 많이 입학해서 눈에 띄는 인물도 많은 것 같습니다. 260명 입학했어요.”

-많이 바쁘시죠?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는 출장이 잦았어요. 매년 3개월 정도는 해외에 있을 정도였으니까. 업무 관련한 세미나, 국제포럼 등에 열심히 참가했거든요. 해외 출장이 줄어드니까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어요. 병원 식구들이 좀 괴롭죠.(웃음) 저녁 모임이 거의 없고요. 코로나19 관련 회의와 발표, 그리고 본의 아니게 언론 인터뷰 및 방송 출연 등이 많아졌습니다.”

이왕준 이사장(왼쪽) <사진 한겨레>

-우리나라는 코로나19 확진자 발생이 안정화되는 추세입니다. 유럽, 미국은 언제로 보십니까.
“유럽은 곧 정점을 찍을 것 같고, 미국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굉장히 영리합니다. 바이러스가 독하면 숙주(인간, 동물 등)를 죽여서 널리 퍼지지 못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적당히 독해서 활동량이 많은 젊은이는 죽이지 않고 활동량이 적은 노인에게 큰 피해를 줍니다. 확산이 잘 되게끔 최적화 된 바이러스란 생각이 들어요.”

-선진국이라 불리는 유럽, 미국이 피해가 컸던 이유는 뭐라고 보시는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확산 초기 마스크 착용이 잘 이뤄졌나, 그렇지 못했나 차이도 크다고 봅니다. 유럽, 미국이 마스크 착용 중요성을 간과한 측면이 있습니다. 심지어 미 질병관리본부는 의료진만 쓰고 일반인들은 필요 없다는 말까지 했으니까요.”

-마스크 착용은 의학적으로 상식적인 판단이라 생각 드는데.
“마스크 수급의 문제가 있었다고 봐요. 무엇보다 대규모 감염병에 대한 경험의 유무가 이번 사태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이번 사태를 잘 막은 대만은 사스 때 워낙 피해가 컸거든요. 초기 대응의 중요성을 잘 알고 대처할 수 있었죠. 우리도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어느 정도 조기 방역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고요. 유럽과 미국은 근래에 그런 대규모 감염병에서 떨어져 있었거든요. 개별 질병에 대처하는 선진 시스템은 갖고 있지만 전국민 방역과 대책은 갖고 있지 못했죠. 미국의 피해가 컸던 것은 미 질병관리본부의 부정확한 진단 키트 문제도 있었고, 중국발이어서 오히려 안이하게 대처했던 것 등이 겹쳐진 결과라 봅니다.”

-스페인 독감처럼 가을 2차 유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1918년 봄에 발병한 스페인 독감이 코로나19의 유행 사이클과 시기적인 유사성이 있죠. 스페인 독감은 2차 가을 파동 때 1차 때보다 5배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했죠. 2차 때 바이러스 변이가 이뤄져 더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게 아닌가라고 추측하죠. 지금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계속 추적해 분석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변이가 쉬운 RNA 바이러스라 그런 나쁜 상황이 안 오리라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화롯불처럼 잠잠했다가 계기가 생기면 확 타오를 수 있죠. 더욱이 RNA 바이러스는 백신 만들기도 쉽지 않습니다.”

-치료제와 백신을 만들기 위해 범정부 기구가 만들어진 것으로 압니다.
“얼마 전 코로나19 치료제·백신개발 범정부 지원단이 출범했죠. 치료제, 백신, 방역물품·의료기기 분과로 구성했습니다. 저는 방역물품·의료기기 분과장을 맡았고요. 분과위원회, 총괄위원회가 매주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손으로 백신과 치료제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죠.”

-페이스북에 올린 코로나19 이후 ‘감염병 사회’가 뉴노멀로 정착할 거란 전망이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실제적인 21세기가 시작됐다고 봅니다. 1914년 사라예보 총성으로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이 20세기의 실제적 시작을 알린 것처럼요. 우리는 이제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감염병 시대에 맞는 ’뉴 노멀(new normal)’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젠 일상에서 해외여행이 쉽지 않고, 에어비앤비 등 공유경제도 성장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국수주의적 보호무역도 상당 기간 강화될 테고요. 4차 산업혁명이 역설적으로 이 전염병 때문에 본격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왕준 이사장은 ‘병원 고치는 의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쓰러져가는 병원 두 곳을 인수해 성공적으로 재건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에게 병원 컨설팅을 의뢰하는 이들이 많다. 현재 그는 인천-고양-제천에 종합병원 3개, 요양병원 1개, 요양원 2개를 운영하고 있다. 세 개의 종합병원은 전체 1300병상 규모다. 직원 3000명, 의사 350명이 일하고 있다.

-병원 운영에는 어려움은 없나요.
“명지병원이 국가지정 격리병상을 운영하는 29개 병원 가운데 하나입니다. 1월부터 확진 환자를 입원, 치료해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9명의 확진 환자를 받아 치료했습니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지만, 병원계 전체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확진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거점병원들은 외래, 입원은 물론 응급실 환자마저 크게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로 인한 경영악화도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감염병 거점병원 운영에 대해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최근 코로나 사태 이후에 실시한 직원 설문조사에서 우리 직원들 또한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결과가 나와 큰 자부심을 갖게 됐습니다.

저는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투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인천사랑병원(전 세광병원)을 인수할 때가 IMF 이후인 1998년입니다. 34세 때였죠. 명지병원을 인수했던 2009년은 리먼브라더스 사태가 터진 다음해였고요. 후발 주자들은 기존 질서가 흔들릴 때 기회가 옵니다. 2009년 명지병원을 인수할 때 인수자로 L그룹이 유력했습니다. 저는 경제력에서 상대가 안 됐죠. 그런데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세계 경제위기가 왔고, 현금 확보가 중요한 L그룹이 인수를 포기하면서 저에게 기회가 온 거죠.”

-그런 위기 상황에서 두려움은 없었는지.
“인천사랑병원을 인수할 때도 사적으로 3억원을 빌려서 시작했어요. 그 다음해에 다 갚았지만요. 명지병원 인수할 때도 다들 무모하다고 말렸지만 인천사랑병원으론 성이 안 찼어요. ‘맨주먹 붉은 피’ 정신이라 할까요. 사실 지켜야 할 게 많은 사람이 두려움이 크지요. 도전하는 사람은 오히려 홀가분합니다.

병원 경영과 혁신전략을 신약 개발에 비유하자면 당시 200여 병상의 인천사랑병원이 실험실 단계였다면, 당시 500여 병상의 명지병원은 임상시험 단계라 할 수가 있죠. 그런 비유로 보면 앞으로는 정식 승인을 받고 보편적 임상 판매 단계로 나아가야겠죠. 이제까지 쌓은 노하우를 기반으로 또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캔서롭이라는 바이오 회사도 인수하셨는데.
“병원 사업의 한계 때문이죠. 현 건강보험 수가체계 아래서는 환자진료에 기반한 병원 사업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의 새로운 기회를 만들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지요. 리딩 병원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 하고 그게 바이오산업과 접목된 연구중심병원입니다. 캔서롭을 인수한 이유죠.”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신다면.
“2015년부터 새로운 동력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 바이오 비즈니스는 병원을 중심으로 해야 큰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어요. 임상시험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을 뿐더러 다학제적인 연구 개발을 기초와 임상을 통합해 내면 훨씬 시너지를 냅니다.

당시 바이오산업 붐이 조성될 때였어요. 물이 들어오는데 배를 만들기 시작하면 때가 늦었다고 판단해서 차라리 기존 코스닥 상장 업체를 인수하는 게 낫겠다 싶었죠. 은사이신 서정선 회장님이 운영하는 마크로젠의 자회사였던 MG Med를 인수할 수 있었지요. 분자진단기기 생산 및 유전체 분석에 근거한 면역치료제를 개발하는 회사로 변신시켰습니다. 2004년에 최초 상장됐고, 제가 인수한 것은 2017년 12월입니다. 최근 코로나 국면에서 진단키트 개발과 수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요.”

-2009년 명지병원 인수 후에도 병원 정상화가 만만치 않았을 터인데.
“돌이켜 보면 저는 상처 없이 나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늘 가시덤불이 나타나고 또 헤치고 가고 하지요. 2009년 명지병원 인수하던 해에 신종플루가 돌았어요. 우리 병원에서 선도적으로 치료할 수 있겠다 싶어서 과감하게 올인했죠.

새로 온 이사장이 무모한 짓을 한다는 말도 들었어요. 하지만 명지병원이 무엇으로 대형병원과 경쟁해서 국민에게 인식될 수 있겠느냐,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에서 우선 1등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죠. 다른 병원들이 신종플루 환자 200~300명 볼 때 우리는 24시간 진료하면서 서너 배를 더 봤습니다. 그때 ‘신종플루 1위 병원’이란 타이틀을 얻었고, 메르스에 이어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도 매우 선도적이고 헌신적인 병원으로 알려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왕준 이사장은 1987년 민주화항쟁 당시 서울대 운동권의 핵심 인물 중 한명이다. 학생운동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돼 6개월 실형을 살았고, 대학에서 무기정학까지 받았다. 의대생으로는 드물게 민주화운동에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현재 제4대 서울대병원 발전후원회 회장과 의대동창회 감사를 맡고 있다.

-경영자로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것 같습니다. 재학시절에도 이런 면모가 있었겠죠.
“친구들은 제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이 설치고 다니는 것은 똑같다고 할 거예요.(웃음) 그나마 제가 의대 입학 성적이 좋아서 학창시절 공부를 좀 안 했어도 그 덕은 좀 보고 있어요. 인생도 ‘일정 질량 불변의 법칙’이란 생각이 들어요. 평생 공부할 양, 욕 먹을 양, 행복과 고통의 양도 일정량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요새 1년 출장 중 절반 이상이 학회 참가인데, 학창시절 안 한 공부를 귀 빠지게 보충하나 봅니다.(웃음) 오히려 교수 친구들은 학회에 가면 자기 발표 끝내고 좀 여유가 있는 거 같은데, 저는 3일이면 3일 내내 공부합니다.”

-일반 외과 전문의이신데 박사는 의사(醫史)학으로 받으셨습니다.
“서울대는 외과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1년간 병원 펠로우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병원(인천사랑병원)을 운영하면서 쉽지 않았죠. 그래서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니 메디컬 히스토리였어요. 마침 의사학 주임교수이신 황상익 교수님과 친분도 두터웠고요. 너무 먼 옛날이야기는 싫고, 한국 근현대의학사 중 연구가 안 된 분야를 찾다가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주목하게 되었죠. 서울대학교의 역사에서 ‘국대안 파동’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왕준 이사장의 박사논문 주제는 미네소타 프로젝트였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6·25전쟁 후 미국이 진행한 ‘서울대 재건 프로그램’이다. 1955~1961년 서울대 의대, 공대, 농대 등 3개 단과대학 교직원 226명이 3개월에서 4년 동안 미네소타주립대에서 연수를 받았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국 의료진은 77명. 이들은 주말에도 쉬지 않고 하루 두세 시간 쪽잠을 자며 학업에 몰입했다.
홍창의 전 서울대병원장(92), 고(故) 이상돈 전 중앙대 의무부총장, 한국 바이러스 연구의 대가인 이호왕 박사(86) 등이 프로젝트 주역이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한국 의학 교육에 미친 영향’을 주제로 연구를 시작했는데 의대나, 서울대 도서관 어디에도 제대로 된 자료가 하나도 없어요. 있어봤자 겨우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분들의 개인 회고록 정도였어요. 결국 미국 미네소타대학교를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됐어요. 우선 자료가 있는지 미네소타대학에 유학 중인 분을 통해 확인해 보니 아카이브에 커다란 박스가 6개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우선 목록을 만들어 달라고 하고, 제가 2주 뒤에 현지로 가서 대부분의 자료를 통째로 복사해 왔죠. 복사비만 150만원 이상 들었어요. 정말 꼼꼼하게 안 버리고 모든 자료를 다 보관해 놓았더군요.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7년간 총 78명의 자문관이 한국에 왔었는데 그 분들 대부분이 개별 보고서를 썼고, 매년 2차례의 총괄 보고서가 작성됐어요. 책임자는 슈나이더 박사였습니다. 교환교수로 간 한국측 유학생들의 영어 성적까지 꼼꼼히 다 기록해 놓았더군요. 그 다음으로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분들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다들 연세가 많으셔서 마지막 채록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2004년 서울대에서 100호 명예박사를 받으신 골트(Gault) 박사와의 마지막 인터뷰는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박사 논문은 미네소타대학에서 수집한 자료와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15박 16일 동안 서문부터 결론까지를 한번에 쭉 써내려 갔습니다. 이후 저의 박사 논문이 서울대 의대 100년사에도 반영됐고 그 때 수집한 자료들은 서울대 도서관 등으로 넘어갔지요. 작년 봄부터 서울대 본부의 지원을 받아 의대뿐 아니라 농대, 공대, 수의대, 행정대학원 등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혜택을 받은 단과대학의 연구자들이 모여서 다시 통합 정리를 하고 있는데, ‘미네소타 프로젝트’ 총괄 보고서가 곧 출간될 예정입니다.”

-워커홀릭이신가요? 직함도 많고 병원을 운영하는 데 굳이 박사학위까지 필요해 보이지는 않는데.
“제가 원래 역사를 좋아했고,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의대 예과 시절에는 인문대와 사회대에서 김윤식, 안병직 교수님 수업을 도강하고 다녔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문-사-철에 로망이 있었죠. 그 덕분에 학생운동할 때 인문대, 사회대 친구들에게도 ‘말발’에는 밀리지 않았어요.(웃음) 워커홀릭이라기보다 하고 싶은 일은 꼭 하겠다는 집념이 강한 편이죠. 박사논문 쓸 때도 무척 즐거웠습니다. 학문 하는 즐거움이 이런 건가 하고 뿌듯해 하기도 했고요. 박사학위 받은 사람과 아닌 사람은 뭔가 또 다르잖아요.(웃음)

제가 서재필기념재단 이사를 오랫동안 맡고 있는데, 2011년 서재필 서거 50주년을 기념하며 평전을 쓸 때 4부 ‘의사 서재필’ 파트를 집필했어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지만 일생을 의사로 살았고 미국 최초의 조선인 출신 의사였으니 제가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일주일 여유가 생기면 뭘 하고 싶으세요.
“매일 밤 클래식, 오페라 공연을 볼 거예요. 저에게 공연장은 가장 행복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지요. 재작년 여름휴가 때도 독일 뮌헨에서 7박 8일 동안 매일 오페라 공연을 봤어요. 공연장에 가면 여러 사람과 같이 보고 듣는 것 같지만 사실상은 세상과 차단돼 나 혼자만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는 거지요. 무대의 공연을 즐기지만 실은 그 시간과 공간이 오로지 나에게 맞춰져 있다는 느낌을 갖지요. 평온과 생기를 동시에 향유할 수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공연을 즐길 수 없어서 많이 답답하죠. 그래서 집에 있던 오디오를 병원에 가져다 놓았어요. 시간 날 때 제 방에서 볼륨을 크게 틀어놓고 1시간 정도 음악을 들으면 뇌를 샤워한 것 같은 기분이 들죠. 코로나19 사태만 안 터졌어도 지금쯤 미국 시카고 오페라극장(Chicago Lyric Opera)에서 바그너의 반지 시리즈 4부작을 감상하고 있었을 거예요.”(인터뷰 이선민 <조선일보> 선임기자, 정리 김남주 <서울대총동창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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