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다시 태어나도 기자’ 박기정 선배, 금강산에서 뵈시죠

박기정 언론재단 이사장이 2002년 제1회 동아시아기자포럼 축사를 하고 있다.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박기정 선배, 뭐가 그리 급해 서둘러 떠나셨습니까? 어제 떠난 박 선배가 벌써 그립습니다.

불과 2주전 박 선배와 저녁을 하기로 하고, 어제 날짜를 잡아 이렇게 카톡을 보냈는데, 이렇게 답이 오다니 이 어찌 된 말씀입니까?

“형님 만난 게 제겐 얼마나 축복인 줄 모릅니다. 3월 4일 저녁 시간 괘않으시죠. 2002-3년 천하의 박선배 뵌 게 저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이상기드림”

“안녕하세요 회장님 아버지 딸입니다. 오늘 갑자기 아버지께서 하늘나라에 가셨어요. 생전에 아끼시던 도민 지인분이신 걸로 알아 말씀드립니다. 마음으로만 위로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ㅠ 감사합니다.”

오는 3월4일 박 선배께서 언론재단 이사장을 할 때 이사였던 김주언 선배와 저녁을 하기로 했거든요. 그 자리에 함께 모시고 싶었던 겁니다.

2002년 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박 선배가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으로, 저는 한국기자협회 회장으로 만나 20년이 다 돼 갑니다. 그리고 2003년 12월말까지 만 2년간 박선배와 맺은 인연의 산물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4월초 한중기자교류 방문을 마치고 박 선배 방에 들러 차를 마시던 중 이런 대화가 오갔죠? “이 회장, 금강산 다녀왔어?” “네, 교육부 출입하던 1999년 초가을 다녀왔습니다.” “기자들 갔다온 사람들 좀 있을까?” “거의 없을 겁니다. 아직 금강산 관광 4년이 채 안됐으니요.” “그럼 기자협회에서 주관해서 기자들 금강산 다녀오세요. 언론재단에서 후원할 게.”

박 선배, 그해 7월 중순 한국기자협회 회장단, 시도협회장, 사무국장단, 일부 이달의기자상 심사위원 등 60여명이 금강산에서 한반도 통일과 남북관계 개선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당시 참석자들은 밤엔 촛불을 켜고 ‘우리의 소원’을 부르며 통일기원제를 지냈지요. 당시 사건은 2007년 봄 세계기자연맹 금강산특별총회의 직접 계기가 됐지요. 전세계 300명 기자가 금강산에서 북한을 바라보며 한반도평화를 함께 염원했었지요.

기억나시죠? 박 선배 2002년 말 한국의 대표적인 언론단체, 즉 신문협회·방송협회·편집인협회·피디연합회·언론노조·기자협회의 대표·사무총장 그리고 언론재단 임원 등 모두 15명이 모여 송년모임을 가졌던 일 말입니다. 이 역시 박선배의 안목과 혜안 그리고 통합에 대한 의지 덕분에 가능했지요. 그런데 당시 참석자 중 벌써 세분이 고인이 되셨으니요.

박 선배 해가 바뀌어 2003년 6월 박 선배와 저는 2002년 한국기자상 수상자들과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방문해 고려일보 창간 80주년 행사에 참석했었죠. 그때 극장 안을 꽉 메운 고려인 2, 3세들의 모습이 선합니다. 박 선배 말씀이 전해옵니다. “고국은 이역만리 해외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여러분의 조부모·부모를 영원히 기억하고 존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고려일보같이 열악한 환경에서 모국어를 지키려는 동포매체들 우리가 발굴해 후원하자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실제로 몇곳을 지원하셨지요.

그해 기자들 어학실력 높여야 글로벌시대 좋은 기사 쓴다며 대전·광주 등 언론재단 지사를 통해 영어교실을 개설하셨죠. 대전에서 오전 현판식 하고 기분 좋게 시작한 낮술에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벌써 뵙고 싶은 박 선배.

그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추억거리, 산경험을 제게 주신 것 이 글을 통해 감사드립니다.

박 선배를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동아일보 출신으로 한겨레 기자인 저를 한 식구처럼 늘 대해주신 것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념이나 진영을 떠나 늘 불편부당한 사실보도만이 언론의 사명이라고 일러준 점도 있구요.

박 선배라고 어찌 흠이나 후회가 없었겠습니까만 그것이 저와 선배와의 소통엔 문제가 되지 않았지요.

가령 1975년 동아일보 사태때 해직되지 않아 받았을 선후배 동료들의 눈총은 저만의 선입견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동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삶의 치열함을 더하는 계기가 되는 일이 많음을 저도 알 나이가 지나고 있거든요.

천관우 선생을 기리자는 의견을 선뜻 받아주신 것도 제겐 참 고마운 일로 남아 있습니다. 재작년 늦여름 박선배와 신학림 전 언론노조 위원장, 저 이렇게 셋이 프레스센터 19층에서 한 저녁이 박 선배와의 오프라인 마지막 자리였습니다.

박기정 선배. 코로나19로 나라가 많이 어렵습니다. 형수님께선 이런 걸 고려해 부음도 내지 않았다고 하시더군요. 아마 박 선배의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끝까지 남에 대한 배려···.

아까 조문을 가니 입관예식을 하더군요. 아마도 선배께서 좋아하시던 곡이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과 ‘나의 갈 길 다가도록’이었어요.

따라 부르다 이 곡들의 제목을 이렇게 바꾸면 그게 바로 박 선배의 삶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내 존재이유 언론을 더욱 사랑’

박 선배께 마지막으로 보낸 카톡 그 나라에 도착하면 읽고 답 보내주세요.

“박선배 먼길 가볍게 가십시오. 이승의 인연으로도 충분하지만 그래도 아쉽습니다. 회자정리 이자정회. 형님 금강산에서 내세에 뵙겠습니다. 이상기 드림”

박기정 전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동아일보 전 편집국장 전남일보 전 사장, 전 함경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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