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통신 탈매지 지국장님, 당신의 북한소식에 늘 감사했습니다”
[아시아엔=이정철 기자] 북한전문 취재기자로 이름을 떨친 AP통신 에릭 탈매지 평양지국장이 세상을 떠났다. AP는 5월 16일 “57세인 탈매지 지국장이 일본에서 달리기를 하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북한을 떠나 10년 이상 한국에 살고 있는 필자에게 탈매지 지국장 사망은 무겁게 다가왔다. 탈매지 지국장의 기사를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인스타그램 팬인 필자는 종종 그의 인스타그램을 방문해 북한 일상이 담긴 사진들을 보곤 했다. 탈매지 지국장의 인스타그램 페이지는 한국에 살고 있는 탈북민 기자로 하여금 10여년 전 떠난 고향을 되새기게 하는 창구이기도 했다.
탈매지 지국장 사망 기사를 본 후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습관처럼 그의 인스타그램을 방문했다. 북한 구석구석 다양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넘기며 탈매지 지국장의 북한 취재일기를 다시 읽어나갔다.
1962년 미국 워싱턴주 렌턴시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탈매지 지국장은 일본 마이니치신문에서 잠시 일했다. 일본어에 능통하고 일본인 히사코씨와 결혼해 두 자녀를 뒀다. 1988년 마이니치신문을 떠나 AP통신에 합류했다. AP통신은 평양에 2006년 영상부문 지국을 개설한 데 이어 2012년 종합지국을 세웠다.
2013년 AP 평양지국장에 임명된 탈매지는 도쿄에 지내면서 거의 매달 북한을 오가며 북한 관련 기사를 써왔다.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주로 북한 변화상을 보도했다. 그는 접근 가능한 범위 내에서 북한 주민의 일상 관련 보도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지금도 크게 변한 건 없는 무인도사회 북한. 그동안 북한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주로 ‘핵무기’ ‘기아’ ‘강제수용소’ 등 독재체제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이미지였다. 북한은 세계에 그런 정도로 알려져 있었고, 세계는 그 이상의 관심은 없었다. 북한은 ‘딱 그 정도의 사회’로 남아있으면 그만이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탈매지 지국장의 북한취재에 대한 남다른 열정은 폐쇄된 북한사회를 좀 더 다양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창구를 전 세계에 제공해줬다. 북한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도우려 한 것이다. AP통신 샐리 부즈비 편집국장은 “수년 동안 탈매지 기자의 예리한 취재는 전 세계가 베일에 가려진 북한을 볼 수 있도록 도왔다”며 “탈매지는 기자로서의 책임감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근 수년간 워싱턴과 평양 사이에 주로 오갔던 이슈는 핵과 미사일이었다. 언론은 앞다투어 핵과 미사일에 관한 이슈를 실어 날랐다. 하지만 탈매지 지국장의 눈은 격렬한 핵 이슈로 인해 언론에서 잊혀지거나 무시되어 왔던 북한사회의 다른 면을 담으려고 했다. AP 국제부문 이안 필립스 부사장은 “탈매지는 어떤 것을 마주치든 거기 담긴 깊은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미니선풍기를 들고 있거나 핸드폰을 사용하거나 혹은 해변을 걷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맥주병을 들고 있는 평양 주민이 그의 시선에 들어오면 여지없이 기사로 재탄생했다. 그뿐인가. 노동현장에 투입된 군인, 학교 가는 아이들, 버스 기다리고 있는 주민들, 머리 위에 보따리를 미고 걷는 주민 모습 등 북한의 소소한 일상은 그의 카메라를 피하지 못했다.
북한에 살다 보면 총보다 삽과 곡괭이를 들고 노동하고 있는 군인들은 쉽게 볼 수 있다. 키가 삽이나 곡괭이 길이와 별 차이가 안 나는 군인들도 많다. 북한 주민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북한의 또 다른 이미지다. 일부 사진 속 북한은 내가 10여년 전에 본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미니선풍기, 휴대전화, 택시 등은 원래 북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특히 그러한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외국인 기자는 더더욱 없었다.
탈매지 지국장의 인스타그램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북한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평양공항에 붙어 있는 ‘조 선 속 도’ 선전문구처럼 빠르지 않지만 조금씩 문을 열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 기자들이 북한 미사일이 과연 미국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에 관심 있을 때 탈매지 지국장은 미사일과 관련된 이슈뿐 아니라 일상적인 북한 모습도 전하려고 했다. 그는 북한에서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취재할 수 있게 허가받은 몇 안 되는 기자들 중의 한명이었다. 그는 당국의 허가를 백분 활용해 북한 구석구석 외국인 기자로서 첫 발자국을 남기며 그동안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을 보여주었다.
탈매지 지국장은 2014년 북한당국의 취재허가를 받아 일주일간 자동차로 백두산과 개마고원을 다녀왔다. 개마고원은 양강도, 함경남도, 자강도 지역에 걸쳐 있는 고원이다. 양강도가 고향인 필자는 농사와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에 많이 올랐는데, 산 정상에서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개마고원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한 눈에 북한지역을 여러 곳 볼 수 있어 외국인들 접근은 극히 제한됐다. 따라서 감시원이 붙고 주민과 대화가 금지되는 등 통제가 엄격했다. 북한이 서방기자에게 장거리 취재허가를 해준 것은 극히 이례적일이다. AP는 “탈매지 지국장은 북핵 이슈와 정치적인 문제를 전할 때 공정하려 애썼다. 북한에 대한 탈매지 지국장의 분석은 북한체제에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탈매지는 북한에서 독립된 저널리즘을 대표하는 기자 중 1명이었다”고 했다.
탈매지 지국장은 2015년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언론이 북한을 건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묘사하거나 너무 쉽게 경멸과 조롱에 기대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면서 “평양지국장으로 있으면서 평범한 북한 주민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가족과 재산, 건강, 친구에 대해서 신경 쓰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느꼈고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탈매지 지국장은 “북한에서 정해진 취재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면, 아침에 일어나 ‘오늘 아무데나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서 “바닷가에 갈 수도 있고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다. 그냥 집에서 감자칩을 먹는다고 해도 아주 자유로운 기분이다. 더는 이런 걸 당연시 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런 탈매지 지국장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필자가 한국에 와 살면서 좋은 점들 가운데 하나는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일상이었다. 교통카드 하나만 있으면 서울 전 지역을 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방으로 갈 수도 있다. 모두 북한에는 없는 것들이다. 다른 지역을 가려면 허가증을 받아야 하고, 이동수단도 편치 않아 몇시간이면 갈 수 있는 지역을 며칠을 걸어서 가야 했다.
자유, 특히 언론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취재한다는 것은 고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다른 기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북한의 다양한 모습을 담을 수 있었던 탈매지 지국장의 취재도 북한당국의 허가가 있어야 가능했다. 짐작컨대, 탈매지 지국장은 취재를 끝내고 일본에 돌아올 때마다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집’에 온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가 어디에 있든 자유가 있는 곳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