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베드로’ ‘공자와 안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성공하는 스승의 조건?”

예수와 베드로(왼쪽)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스승의 날은 스승의 은덕에 감사하고 존경하며 추모하는 뜻으로 제정한 날이다. 인생에 있어 스승이 계시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진정한 스승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알려주고, 그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고 실현해 나가는데 가르침을 주는 분이다.

필자 역시 인생의 스승이 계시다.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살다가 겨우 나이 45세에 일원대도(一圓大道)를 만났다. 그리고 비로소 인생의 스승을 만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하고 있다. 인생에서 훌륭한 스승을 모신다는 것은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는 행운이다.

그리고 스승은 좋은 제자를 만나야 한다. 훌륭한 제자를 만난다는 것은 뜻과 꿈을 물려줄 수 있는 후계자를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승은 등불, 제자는 후계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이루어 질 때 숭고한 사제애(師弟愛)가 생긴다.

원불교를 창립하신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 별자리를 보고 약관의 제자 정산(鼎山) 송규(宋奎) 종사를 맞이했다. 경상도 성주에서 전라도로 스승을 찾아오는 것을 아신 것이다. 그리고 손수 애제자를 찾아 영광에서 정읍 화해리까지 찾아가 숙겁(宿劫)의 인연을 확인하셨다. 만약 소태산과 정산의 위대한 만남이 없었던들 오늘날 100년밖에 안 된 원불교가 4대종교의 반열에 오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사각의 정글에서 야수와 같이 울부짖던 필자가 원불교를 만나 인생의 스승을 만나지 못했던들 내 인생이 오늘같은 행복을 누릴 수는 없었을 거다. 나는 스승님을 만난 이후 한번도 스승님의 명을 거역한 일이 없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다.

일편단심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스승님의 명을 하늘처럼 받들었다, 간혹 엄교(嚴敎)와 중책(重責)을 내리시더라도 한 점의 불평이나 불만이 없이 달게 받았다. 어쩌면 지금까지 칭찬보다는 꾸중을 더 많이 받는 것이 오히려 기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학문이 뛰어나고 잘 가르친다 해서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자 사랑의 진정한 마음과 걱정으로 제자의 앞날을 인도해 주고 등불이 되어 줄 수 있어야 참 스승이 될 수 있다. 제자에게 불보살의 꿈을 꾸게 만들고, 그 꿈을 이루도록 끊임없이 격려해주는 멘토가 될 때 참된 인생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훌륭한 스승은 인재발굴 안목과 인재양성 능력을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참된 스승은 좋은 인재를 고를 줄 아는 안목과 지혜 그리고 훌륭한 인재로 키울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훌륭한 스승 밑에 뛰어난 제자가 있다”고 했다.

당나라 최고의 문장가 ‘한유’는 ‘백락(伯樂)의 천리마’라는 글에서 인재발굴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여 강조하였다. “이 세상에는 천리마는 있으나 천리마를 볼 줄 아는 ‘백락’은 늘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리하여 천리마라 할지라도 보통의 말로 혹독하게 부려지다가 결국 마구간에서 죽고말리라”고 했다.

인재는 많이 있으나 그 인재를 발굴할 수 있는 스승은 드물다는 뜻이 아닐까? ‘공자와 안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예수와 베드로’ ‘소태산과 정산’ 같이 훌륭한 스승과 좋은 제자의 인연이야 말로 숙겁의 인연이다.

이와 같이 인생에 스승이 안 계시면 그 인생이 고달프기 마련이다. 스승을 찾으면 사제 간에 사이가 없어야 한다. 그 사이를 없애는 방법은 신(信)만 돈독하면 된다. 그리고 스승의 허물이 눈에 뜨일 때에는 스스로 박복함을 한하는 것이다. 그래도 의혹이 풀리지 않을 때에는 직접 고하여 해혹(解惑)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스승의 법(法)이 제자에게 전해진다.

어찌하면 스승의 법(法)을 이어 받아 대업을 성취할 수 있을까? 스승이 제자를 만나면 먼저 그의 신성(信誠)을 본다. 제자가 독실한 신심이 있으면, 그 법이 건네고 공(功)을 이룰 것이요, 신심이 없으면 그 법이 건네지 못하고 공을 이루지 못한다. 그럼 무엇을 일러 신심이라 할까?

첫째,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스승의 모든 지도에 오직 순종할 따름이다.
셋째, 스승의 명을 달게 받는다.
넷째, 스승의 앞에서는 자기의 허물을 숨기지 않는다.

이 네 가지를 구비(具備)하면 특별한 신심이라, 능히 불조(佛祖)의 법기(法器)를 이루게 된다. 봄바람은 사(私)가 없이 평등하게 불어 주지마는 산나무라야 그 기운을 받아 자라고, 스승님은 사 없이 평등하게 법을 설하여 주지만 신 있는 사람이라야 그 법을 오롯이 받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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