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대로 알기] 中 넘어 한·일·베트남 사회문화 중심에 선 ‘공자’

[아시아엔=중국을 읽어주는 중국어교사 모임] 공자(콩즈)는 중국 춘추시대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 교육가이며 유학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요순시대부터 하・은・주 시기의 문화와 학술을 정리하여 자신의 학문적 기초로 삼았고, 이는 후대 중국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죠. 공자는 정치에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가로서 성공을 하지는 못합니다.

공자가 죽은 후에 유학의 걸출한 인물이었던 맹자와 순자를 거쳐 유학의 지위가 한층 더 높아졌고, 한(漢) 무제가 유학을 국교로 선포한 이후에 유학은 중국 봉건 사회를 지배하는 중심 사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일부 학자는 공자의 사상이 후대 중국 문화 형성에 끼친 영향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언급합니다.

공자는 하늘의 뜻이라 일컬어지는 ‘천명(天命)’을 인정했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하늘의 뜻만을 기다리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쟁취하자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하였다. 또한 공자는 도덕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는 이후 절개와 개인의 성품을 중시여기는 중국의 전통을 만드는 밑바탕이 되었다. 도덕 교육이 종교를 대신하고 무신론적인 풍토를 조정할 수 있었던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후 유학은 본래 공자가 의도했던 사회 질서를 논하는 건전한 학문에서 괴리되어 점점 예교(예의에 관한 가르침)를 중시하는 형식적인 학문으로 변질됩니다. 공자라는 이름 역시 당시 유학 교리가 만연했던 전통 사회의 대명사로 여겨지게 되지요.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 말, 정부가 서구열강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 내지 못하여 민중의 삶은 더욱 괴로워집니다.

청나라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저항으로당시 사회에서는 전통문화와 전통 사상 타파의 흐름이 나타나는데, 이때부터 중국의 지식인들은 전통 예교 사회의 병폐를 대표한다고 여기던 공자를 부정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있었던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공자에 대한 왜곡된 해석으로 또 한 번 공자는 중국인에게 비판과 응징을 당하게 되지요.

공자 사당을 불태우는 중국인들

이랬던 공자가 21세기, 중국의 중화(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뜻으로, 중국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이르는 말) 문명과 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려고 하는 중국 정부의 정책에 힘입어 중국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2004년 후진타오 전 국가 주석이 정권을 잡으면서, 공자의 가르침 가운데 ‘화이부동(和而不同,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아니함)’이란 말을 새롭게 해석하여, 치정의 목표로 삼습니다. 2004년 1월 11일, 톈안먼(천안문) 광장에 9.5m나 되는 거대한 공자 청동상을 세우고요. 여론에 밀려 100일 만에 철거를 하긴 했지만, 이는 현재 중국에서 공자가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혁명 당시 공자를 부정하는 중국사람들

같은 해 중국 정부는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전파하고 학술적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비영리 단체를 설립합니다. 그 단체의 이름이 바로 ‘공자학원’이에요. 2014년 12월 기준으로, 전 세계 126개 국가에 475개의 공자학원과 851개의 공자학당을 건설하여 문화 사업을 벌이고 있지요. 중국 정부가 역사상 무수히 많은 사상가 중 공자를 선택하여 기구의 이름을 명명했다는 점에서도 중국인과 세계인에 대한 공자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여러 가지 역사의 우여곡절을 겪었어요. 하지만 공자의 사상이 중국 전통사회를 지배하였고, 이후 중국 한족의 공통 문화와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 영향을 끼쳐 유교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니, 공자라는 성인의 중국내외에서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겠죠?<출처=지금은 중국을 읽을 시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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