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수살인’ ‘미쓰백’ ‘완벽한 타인’···한국영화의 어떤 새롭고 다른 그 무엇?

암수살인의 한 장면

[아시아엔=전찬일 영화·문화콘텐츠 비평가, <아시아엔> 대중문화 전문위원] 아시아엔에 올 추석 연휴를 맞이해 선보인 3편의 한국영화들, <안시성>(김광식 감독), <명당>(박희곤), <협상>(이종석)에 대해 “목숨을 구걸 않는 일부 캐릭터들이 인상적”이라는 취지의 진단을 한 바 있다. 어느 모로는 지엽적으로 비칠 수 있는 그 진단(http://kor.theasian.asia/archives/194272)은 지금도 유효하다. 세 영화 중 <안시성>을 제외하고는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다지만, 그들이 크고 작은 문제작들로 머물러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 때문이다. 영화적 완성도가 빼어난 수‧걸작 여부 때문이 아니라···.

내게는 <안시성>의 세 주인공 안시성 성주 양만춘(조인성)이나 태학도 수장 사물(남주혁), 당태종 이세민(박성웅)보다 기마부대장 파소(엄태구)와 그 연인인 백하부대장 백하(설현), 신녀 시미(정은채) 등 조연 캐릭터들이 훨씬 강렬한 인상으로 머물러 있다. <명당>에서는 명 지관 박재상(조승우)이나 흥선(지성)보다는 기생 초선(문채원)이, <협상>에서는 협상전문가 하채윤(손예진)보다 인질범 민태구(현빈)가 더 가슴에 와 닿아 자리하고 있다.

그 배역들을 연기한 배우들에 그만큼 더 관심이 가고, 그만큼 더 좋아하게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가령 설현이나 문채원을 향한 ‘팬심’이 더 단단해졌다. <창궐>(김성훈)에서의 현빈 연기가 상대적으로 심심하게 다가섰다. 결국 나는 위 영화들의 ‘새롭고 다른 그 무엇’(Something New & Different)을 사건보다는 인물과 해당인물의 성격화(Characterization) 그리고 연기에서 찾는 셈이다. 최근 선보인 몇몇 우리 영화들에서의 그런 ‘새로움과 다름’의 가능성에 각별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 가능성이 일시적일지, 지속될지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한다. 만약 지속된다면 천편일률, 다양성 결여 등의 비판‧비난을 받아온 한국영화가 어떤 긍정적 변화 내지 전환으로 나아가는 징후를 드러내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터. <암수살인>(김태균)과 <미쓰백>(이지원), <완벽한 타인>(이재규) 등이 문제의 그 영화들이다.

<암수살인>은 피해자는 있으나 신고도, 시체도, 수사도 없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살인사건들을 영화화한 범죄·형사 드라마다. 부산에서 발생했던 실제사건들을 토대로 극화했다. “일곱, 총 일곱명입니다. 제가 죽인 사람들예.” 수감 중인 살인범 강태오(주지훈)가 형사 김형민(김윤석)에게 어느 날 내뱉는 자백이다. 형민은 특유의 직감으로 그 자백이 사실임을 확신하고, 그가 적어준 일곱 개 살인 리스트를 들고 수사에 뛰어든다. “이거 못 믿으면 수사 못한다. 일단 무조건 믿고, 끝까지 의심하자.” 태오의 추가 살인은 미지의 암수살인 사건인 바, 형민은 태오가 거짓과 진실을 교묘히 뒤섞고 있다는 걸 알게 되나, 결코 수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일찍이 다른 지면에서도 피력했듯, 형민의 선택 폭은 넓지 않다. 최후까지 그와 함께 하는 이는 후배 조형사(진선규) 뿐, 형민의 유일한 선택은 ‘절대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왜? 실적 운운은 말자. 형사로서 사명감이나 정의감 때문은 아니다. 자존심 때문도 아니다. 그는 그런 멋진 형사 타입과는 무관하다. 있는 집안 출신인 게 틀림없는 그는, 대다수 여느 형사들처럼 적당히 닳았고 세속적일 대로 세속적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기도 한다. 편법 내지 불법도 마다지 않는 것. 다시 묻자. 그런데도 왜 그는 포기하지 않는 걸까. 이유인즉슨 어떻게든 피해자의 시체라도 찾아 그 억울함을 달래주고 그 넋이라고 기려주기 위해서다. 나 원 세상에, 그런 이유 때문에 포기하지 않은 거라고? 한방 맞은 듯 얼얼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런 형사 캐릭터가 있었던가. 내 기억에는 없다. 이 영화의 시각에 놀란 으뜸 까닭이다.”

형민 역을 김윤석이 최상의 유연함으로 완벽히 소화해냈다. 꽉 차 있음과 철저히 비어있음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판단컨대 생애 최고 연기다. 김윤석 그는 장준환 감독의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2013), <남한산성>(2017, 황동혁), <1987>(2017, 장준환) 등 최근 들어 최고 기량의 연기를 펼쳐왔는데, 최절정에 이른 느낌이다. 전작들에서는 발견하기 힘들던, 힘을 뺀 고난이도의 연기를 통해서다. 주지훈도 큰 주목감이다.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2016) 이후 김용화 감독의 <신과함께-죄와 벌>(2017)과 <신과함께-인과 연>(2018)을 거쳐 윤종빈 감독의 <공작>에 이르며, 배우로서 상종가를 치고 있는 스타 연기자다. <공작>에서의 열연으로 2018 부일영화상과 영평상에서 남우조연상을 거푸 수상했다. <악마를 보았다>(2010, 김지운)의 경철(최민식)에 비견될 지능적 악역을 실감 넘치게 체현했다.

미쓰백 설명회<사진=뉴시스>

<미쓰백>의 미쓰백 역시 형민 못잖게, 흔치 않은 캐릭터다. 스스로를 지키려다 어린 나이에 전과자 처지가 되어, 형사 장섭(이희준)의 호의‧배려 따윈 아랑곳하지 않으며, 홀로 외롭게 살아가려고 기 쓰는 여인 백상아(한지민). 심지어 장섭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며, 누구도 믿지 않고 살아가던 어느 날 나이에 비해 자그마하고 깡마른 몸에, 홑겹 옷을 걸친 채 가혹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어린 소녀 지은(김시아)과 조우한다. 처음엔 외면하나 그럴수록 자신과 닮은 아이 지은을 떨쳐내질 못한다. 결정적 위기에는 결국 장섭에 의지 않을 도리 없고. 미쓰백은 급기야 지은을 구하기 위해 세상과 맞서기로 결심한다. “이런 나라도, 같이 갈래?”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사회문제인 ‘아동 학대’를 다룬다는 점 등에서 <미쓰백>은 <도가니>(황동혁, 2011)에 직결된다. 영화를 끝까지 지켜보기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아저씨>(이정범, 2010) 같은 액션 영화적 쾌감 따위와는 무관하다. 형사 장섭은 <아저씨>의 아저씨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찌질하기가 미쓰백 못잖다. 그래서 도리어 영화의 진정성이 배가된다. 장섭의 누나 장후남(김선영)의 간헐적 코믹터치 덕에 쉬어가는 지점이 생기긴 하나, 공범자적 죄의식을 안겨주는 영화의 무게를 덜어낼 정도는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좀더 거리를 떼었더라면 싶은 아쉬움이 떠나질 않은 건 그래서였다. 그랬더라면 이 유의미한 문제적 수작을 찾는 관객들이 좀더 많았을 테니까. 그래도 뜻 있는 관객들의 성원에 힘입어 영화는 개봉(10월 11일) 한달여 동안 72만선을 넘었다. 손익분기점도 넘었단다.

이러저런 아쉬움에도 불구, <미쓰백>은 2018년의 문제작으로 손색없다. 감독이 “캐릭터가 내리는 순간의 결정들이 변곡선을 그리는 영화이고, 그들의 감정선을 따라 관객들이 함께 느끼고 공감하길 바랐다”고 밝혔는 바, 그 작의가 100% 실현됐다. 영화는 ‘서로 닮은 듯 다른 아픔을 지닌 상아와 지은의 감정을’ 적절히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무뢰한>(오승욱, 2015) 등을 통해 그 섬세한 실력을 입증했던 강국현 촬영이 한몫했다. “두 사람에게 또 다른 세상을 열어주고,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를 담으려고 했다”는 감독의 바람에 충실히 부응, 대부분 들고찍기로 촬영해 그저 사건을 따라가기보다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섬세히 포착하는데 주력했다. “상아와 지은의 관계 변화에 따라 영화의 힘들고 어두웠던 과거를 그린 전반부는 어두운 조명과 인물에 밀착된 구도로, 험난한 세상과의 싸움을 이겨낸 후반부는 인물과 거리를 둔 구도로 촬영”한 것. 효과 만점이다.

미쓰백 한지민을 잡는 카메라는 또 어떤가. “인물에 최대한 밀착한 클로즈업 촬영을 통해 상아로 변신한 한지민의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얼굴까지 완성시켰다.” 의례적 립서비스가 아니라, 한지민의 연기는 가히 압권이다. (결례를 무릅쓰고 털어놓으면) 그 동안 그녀의 연기에 대해 단 한번도 진지하게 바라보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한지민의 재발견‧재탄생이라 할만하다. 2018년 제3회 런던아시아영화제에 이어 제38회 영평상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성취들이 그 증거다. 뭔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신수원 감독의 <마돈나>(2014)에서 발견의 연기를 펼쳤던 권소현도 상찬에 값한다. 지은을 학대하는 계모 주미경 역으로 영평상 여우조연상을 손에 쥐었다. 지은 역 김시아는 ‘올해의 아역’으로 자격 충분하다.

완벽한 타인의 한 장면.

한편 400만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완벽한 타인들>의 극적 설정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초등학교 네 동창들의 오랜만의 커플 모임에서, 한 사람이 수습 불가의 게임을 제안한다. 다름 아닌 각자의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일정 시간 동안 통화 내용부터 문자, 이메일까지 공유하자는 것. 얼떨결에 시작된 게임은, 일곱 캐릭터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처음에 게임을 제안할 때와는 전혀 다른, 상상치 못한 결말로 흘러간다.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에게도 생애의 비밀이 있는 법, 사실 영화의 이야기 설정은 그다지 설득력이 커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그럴 듯하게 설정 배치에 성공한다. 동명의 이탈리아 영화(Perfetti sconosciuti)를 빌려서다. 휴대폰을 통해 서로의 비밀이 까발려진다는 설정이 큰 관심을 모아 한국뿐 아니라 스페인, 프랑스, 미국, 독일, 카타르, 스웨덴, 터키 등 세계 여러 나라로 리메이크 판권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완벽한 타인>은 이야기의 큰 줄기부터 어느 쪽이 현실인지 아리송한 결말까지 원작 영화를 대체로 충실히 가져왔지만 한국적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달라진 부분도 적지 않다.”

<완벽한 타인>은 캐릭터 및 배우들의 전시장이라 할만하다. 무뚝뚝하고 보수적이면서도 비밀을 지닌 바른생활 변호사 태수(유해진)를 비롯해 모임의 리더이자 성형 명의 석호(조진웅), 꽃중년 바람꾼 레스토랑 사장 준모(이서진),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혼자 나타나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영배(윤경호)가 네 친구다. 문학에 빠져 지내는 가정주부 수현(염정아)은 태수, 게임 제안자인 정신과 의사 예진(김지수)은 석호, 순진할 대로 순진한 수의사 세경(송하윤)은 준모의 짝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영배의 짝은 어떻게 된 걸까?

이 일곱 캐릭터 및 배우들의 매끄러운 ‘케미’가 영화의 으뜸 미덕이다. 그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비밀을 지켜보는 맛이 여간 달콤씁쓸하질 않다. 때론 뜨끔하기도 하지만. <미쓰백>처럼 큰 죄의식을 안겨주는 데까진 않는다. 슬쩍 웃어넘기고 넘어갈 수 있다. 영화의 큰 장점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큰 눈길이 가는 것은 석호 캐릭터다. 그는 다른 여섯 캐릭터와는 다르다. 덜 속물적이랄까. 그나마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유일한 캐릭터다.

이 영화 40억원, 채 안 되는, 중간 예산 규모로 만들어졌단다. 헌데 시쳇말로 터졌다. 크게 써, 크게 벌려, 크게 먹고 ,크게 터는 게 상책이 되다시피 한 이 땅의 투자배급사들선 뜨끔해 하지 않을 수 없을, 단연 주목할 만한 개가다. 제2의, 제3의 <완벽한 타인>을 벌써부터 기다린다면, 너무 성급한 기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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