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야 ‘아흔살 청년’ 박상설의 오대산 ‘가을편지’
삶이 마지막을 향해 갈 때, 무엇으로 이 기쁨 사랴
[아시아엔=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 저자, 캠프나비 대표] 느릿느릿 꼭두새벽에 가을 숲 어둑한 길을 걷는다. 숲을 가로지르며 들국화 언덕 사이로 억새풀이 새벽이슬 머금고 떨고 있다. 나와 마주쳐 막 잠에서 깨어난 억새는 떠도는 나를 본 척도 않는다. 나는 그냥 “안녕!” 한다. 나도 모를 마음의 외마디···.
억새는 외롭고 청정한 산모퉁이에서 기다림과 그리움 없이 끄덕도 않는 자태, 고고하다. 늘 겪는 일이지만 자연 속 동식물 생태계와 인간의 존재 사이에 단절된 초월 境界에 끌려 나는 아포리즘에 잠긴다. 자연이 하는 짓거리와 그 결을 따라 부랑(浮浪)한다.
자연의 여백과 그 그림자 사이의 행간을 보며, 나는 자연의 순수 무구한 세상과 인간사와 단절된 텅 빈 시공의 고요를 표류한다.
가을과 친구가 되는 길, 무엇으로 이 기쁨을 사랴. 현란하게 바쁘기만 한 도시인과 컴퓨터 앞에서 시름 겨운 화이트칼러, 늘 같은 단순노동만 하는 이들도 가을을 타는가?
며칠 새 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이곳 산골에선 들풀이며 나뭇잎이며 풍경들이 야위어 간다. 개울물은 줄어들고 들녘이 많이 비워졌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이때쯤 여름 끝자락에서 옥수수를 따낸 허우대만이 앙상하다. 옥수수의 그 넓고 긴 잎이 바람에 바삭 이는 찡한 가슴 쓸쓸하다.
외롭고 청정한 산모퉁이에서 기다림과 그리움 없이 끄덕 않는 억새풀 자태 고고하다. 늘 겪는 일이지만 자연계의 동식물생태계와 인간의 존재 사이에 단절된 초월 경에 끌려 나는 아포리즘에 잠긴다. 자연이 하는 짓거리와 그 결을 따라 부랑(浮浪)한다.
고요한 삶은 결코 외롭지 않다
나는 기어코 그 검게 삭아가는 버려진 옥수수밭 그루터기 한가운데 자리잡았다. 숨 고르기조차 벅찬 찡한 외로움에 싸인다. 혼자 있는 고통을 나타내는 말은 영어로 론리니스(Loneliness), 혼자 있는 즐거움은 솔리튜드(Solitude)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혼자만의 삶을 지내오기 30년이 넘었다. 흔히들 외로움을 절망의 시간이라 여기지만 나는 깊은 사유와 즐거운 활동을 엮어내는 최고의 삶이라고 여긴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못견뎌 하며 누군가와 늘 같이 있으려고 한다. 누군가에게 의지해 허전함을 메우려 한다. 그 메우는 시간은 그러나 자기를 소비하는 거품일 뿐이다. 외로움은 가족이나 남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해소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체감을 잃고 자신의 세계를 갉아먹는다. 가족과 같이 있을 때에는 각자 영역을 서로 침범하지 않는 자유의 개별화가 보장되어야 한다.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는 삶의 가치이기도 하다.
풀밭에 누우면 세상도 비켜간다
사람들은 혼자 있기를 견디지 못한다. 자기 인생에서 자신이 없어서이다. 삶은 나만의 여행이며, 혼자 가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즐거움과 꿈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혼자 산다는 것은 독신이나 싱글로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족과 더불어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도 고유한 자신만의 즐거운 취향과 아름다움을 만들어갈 수 있다.
자신의 인생 안에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아만족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는 시공간의 자유가 그것이다.
누구의 남편, 아무개의 아내, 그리고 누구 자녀의 부모로 살아가면서 자기 가족만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이기주의는 벗어나자. 이 글을 읽는 동안 오롯이 자기 스스로의 마음을 터놓고 자신과 마주해보자. 자기의 영역을 신성불가침의 경지로 칸막이 하고, 자신과의 만나는 시간을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존의 삶을 만들어 가자.
어디까지가 내 땅인가?
추석이다. 남들이야 무어라 말하든 나의 가족은 옛부터 추석이나 설같은 명절행사를 하지 않는다. 명절이 다가오기 전 집이란 둥지를 벗어나 어디론가 떠난다. 수십년 해오던 버릇대로 나 역시 들판이나 숲에 둥지를 틀고 몇날을 유랑한다. 그 기간 동안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홀로 지낸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석양해를 등지고 어디론가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기러기 떼, 고요한 밤 풀벌레소리가 내게 다가온다. 내가 왜 혼자여야 하는지 풀밭에 누우면 세상도 비켜 가나보다. 저 풀벌레소리와 지새는 하얀 밤이 시리다.
새벽녘 구슬픈 그 소리 어디론가 사라진다. 일렁이는 억세 물결, 높은 하늘의 뭉게구름, 꽃잎을 맴도는 고추잠자리···. 세상을 향한 허무와 더없이 좋은 가을은 내게 열병이 되었다. 누군가 말한, 눈부시게 잔인한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