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우와 자유언론③] 10·24 동아투위 44주년···펜과 마이크는 빼앗겼어도

[아시아엔=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동아일보> 해직기자, 전 국회의원]1975년 동아강제해직 사태 이후에 천관우 선생(사진)은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계셨다. 1976년 3·1명동성당민주구국선언사건에도 참여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자연스레 재야인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그러던 가운데 1978년 10월 동아투위에서 지난 1년 동안 제도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건·사고를 ‘10·24 민주·인권일지’로 묶어 재야인사들과 종교계 그리고 외신 등에 배포했다.

비록 펜과 마이크를 빼앗겼어도 자유언론의 깃발을 들고 있던 해직언론인 안종필 동아투위 위원장 등 10명이 그 파동으로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동아투위의 사무실도 폐쇄당해 모일 곳도 없었다. ?동아투위 사람들은 농성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천 선생 댁으로 가서 농성을 시작했다. 넓지도 않은 선생 댁에 20명 가까운 젊은 해직 언론인들이 하루 종일 그것도 닷새 동안 농성투쟁을 벌였다.

아무 수입도 없이 칩거하고 계신 천 선생 댁에 천지 분간 못하던(?) 젊은이들이 장기 농성투쟁을 벌이고 있었으니 천 선생 특히 사모님의 난감함이라니, 오죽 하셨을까. 세월이 지나 눈감고 생각해보니 송구스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1970년대에 한국고대사 연구에 정진, 동아일보 휴직상태에는 ‘신동아’에, 그리고 동아일보를 떠나신 뒤에는 제도언론의 모든 창구가 봉쇄되자 사학계 학회지 등에 다수의 논문을 집필하셨다. 필자의 서울대 문리대 동기로 사학과 출신인 김종심은 <신동아>에 재직할 당시 학술담당기자였고 이름난 잡지편집자였다.

그는 천 선생의 한국사 관계 논문과 학술대담·좌담 등을 도맡아 처리했다. 그는 천 선생의 난해한 초서체 원고를 해독하는 유일한 편집자로 천 선생께서도 인정하는 준재였다. 그도 천 선생의 심기를 건드려 혼뜨검을 한 일이 있었다. 천 선생은 태어나실 때부터 양 손가락이 불구이셨다. 당신의 양 손이 사진 찍히는 것을 피하셨다. 김종심이 편집한 어느 좌담회 기사에 천 선생 상반신과 함께 천 선생의 손이 그대로 드러난 사진이 실렸다. 김종심이 벼락을 맞았던 이야기는 두고두고 전해진다.

1979년 박정희 시대 말기에 이르러서 천 선생께서는 동아투위와도 거리를 두고 두문불출하셨다. 박 정권의 폭압이 거칠어질수록 더불어 급진화하는 듯한 민주화운동 진영에 대해서도 우려하셨던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10·26 박정희 피살사건과 12·12 신군부쿠데타 그리고 5·18 광주민주항쟁을 거치면서 고조되었을 천 선생의 위기감이 그 뒤 전두환 정권의 의도적 접근으로 더욱 심화하지 않았을까 짐작될 따름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민주주의 건설과 언론자유 창달을 위해 헌신한 천 선생 입장에서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 앞에서 당신의 입지보다 조금 더 우경화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당시의 대다수 민주화운동 진영의 인사들과는 생각을 함께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말년의 천 선생의 삶이 전체 삶의 무게를 지워버릴 만큼 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지금도 우리 언론인들을 기개 높은 선비의 길로 인도해주신 것에 천 선생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고 있다.

[편집자 후기] 그동안 천관우 선생의 자유언론 정신을 회억한 이부영 전 동아일보 기자의 글을 애독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10월 24일 오늘은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44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늘 오후 6시30분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기념식과 제24회 통일언론상, 제30회 안종필 자유언론상 시상식이 열립니다. 관심있는 분의 많은 참석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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