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렴(公廉)의 표상···정약용, 한익상 그리고 노회찬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故 노회찬 의원은 청렴한 목민관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가난을 걱정 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서에서 드루킹쪽으로부터 4천만원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고 고개를 숙였다. “잘못이 크고 무겁다”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대목에서는 그가 자신을 얼마나 엄격하게 대하는지가 잘 느껴진다.
기자가 “진보는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하면서 “진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성, 현실적 힘”이라고 일갈했다. 진보에 도덕이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지만 도덕은 진보정당이 추구할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런데 진보세력의 도덕적 결함에는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엄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억울하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것도 하나의 현실이니까 인정해야 한다. 부정이나 비리의 경우 진보세력에는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이쪽도 저쪽도 돈 봉투를 받았으면 똑같은 죄인데 이쪽에서 받으면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억울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높은 것을 요구하니까 그에 맞춰서 더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도덕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
이 말에서 비로소 그가 여느 정치인들처럼 뻔뻔할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된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활동해온 한 동지는 장례식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돈 받은 사실을 유서에는 쓸 수 있을지언정 주변 사람들에게는 직접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은 평생의 목표로 ‘공렴(公廉)’이라는 대원칙을 삼았다. 다산은 공정하고 공평한 공무집행에 청렴이라는 도덕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때만 목민관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은 그런 목민관을 만나야만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노라고 주장했다.
다산은 저서 <목민심서>(牧民心書) ‘율기’(律己)편 ‘청심’(淸心) 조항에서 “목민관은 청렴할 때에만 제대로 목민관 노릇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임무를 마치고 근무하던 고을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목민관의 모습에 대한 내용이 담긴 ‘해관’(解官)편 ‘체대’(遞代) 조항에서 다산은 다시 청렴한 목민관의 모습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나의 친구 한익상(韓益相, 1767∼1846)은 가난한 선비다. 벼슬살이로 수십 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다. 만년에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자, 친구들이 모두 그의 살림이 좀 윤택해질 것을 기뻐했다. 그런데 경성부에 부임해서도 한결같이 청렴결백하고 녹봉 5만∼6만전을 희사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진휼하고 요역(?役)을 감해주었다. 하찮은 일로 파면되어 돌아올 적에 관내 백성 5천호(戶)의 부로(夫老)들이 교외에 나와 전송을 해주고, 호마다 베 1필씩을 거두어 그에게 노자로 주었으나 모두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돌아와 집안을 살펴보니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은 지가 사흘이나 되었어도 끝내 후회하는 일이 없었다.”
한익상은 순조 7년(1807) 문과에 급제하여 낮은 벼슬에 전전하였기에 가난은 언제나 면할 길이 없었으나 후회하지 않고 탁월하게 청렴한 공직생활을 하였다. 뒤에 무안(務安)현감도 지내고, 강원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청렴만을 목표로 근무하여 언제나 가난한 삶을 면하지 못했다.
그렇게 가난했지만 한익상은 녹봉까지도 더 가난한 백성들에게 희사했으며 그런 결과 임무를 마치고 떠나오던 날, 집집마다에서 주민들이 나와 환송해 줄 정도로 현명한 목민관 생활을 했다. 그러니 다산이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공직자들은 청렴할 때에만 백성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집안에 식량이 떨어졌어도 전별금까지 사양했던 한익상 같은 목민관이 오늘에도 있다면 얼마나 세상이 좋아질까?
다산은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에 반드시 실천해야 할 자신의 임무수행에 대한 각오를 “공과 염으로 온 정성 바치기를 원하노라”(公廉願效誠)라는 각오를 표명하였다.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안 될 두 글자가 바로 ‘공(公)’과 ‘염(廉)’이다.
노회찬 의원은 드루킹 일당에게 두 번에 걸쳐 4000만원을 받았지만 그 돈을 부정하게 쓰거나 사욕을 취하기 위하여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산 ‘공렴’의 공직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