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의원 자살을 비난·폄하하는 이들에게 고함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가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놀라지 않은 국민은 거의 없을 거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빈소에 정치인은 물론 많은 시민들이 조문하며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추모의 물결에 필자 역시 애잔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런데 어느 카톡방에 올라온 글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에도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니 한국언론들은 노회찬의 자살에 동정과 애도를 강요하지 마라. 조국을 지키다 죽은 의로운 죽음과 부정한 검은 돈을 받아먹고 자살한 죽음이 어찌 같을 수가 있는가? 근데도 지금 언론과 정치권은 검은 돈 받아먹고 자살한 사람의 죽음에만 집중적으로 애도하는 분위기를 노출시켜, 자칫 자라나는 청소년들이나 미성숙한 일부 성인에게 검은돈 받아먹고 자살하면 위대한 사람이나 되는 양 아주 잘못된 시그널을 주고 있다.”(이하생략)」
참으로 매정한 글이다. 사람이 죽으면 일단 애도를 표하는 것이 상정(常情)이다. 지나간 과오는 대악(大惡)이 아니라면 용서부터 하는 것이 인간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건만 그 글을 쓰신 분의 냉혹함이 이 무더위에 가슴을 서늘케 한다.
<참전계경>(參佺戒經)제1044에 ‘용’(容)에 관한 가르침이 있다. 용은 만물을 포용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만리(萬里)의 바다에는 만리의 물이 흐르고, 천길 높은 산에는 천 길 높이의 흙이 쌓여 있으나, 물이 넘치는 것도 포용이 아니고 흙이 무너지는 것도 포용(包容)이 아니라고 했다.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덕으로 이루어진 바다와 산은 넘치지도 무너지지도 않듯이 인간도 완전한 조화의 상태에서 완전한 포용을 이룰 수 있다. 천하의 영물인 용(龍)은 세상의 천덕꾸러기 돼지를 싫어한다고 한다. 코가 닮았다는 이유다.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너무 달라서’일까? 아니면 내가 싫어하는 나를, 나의 일부를 ‘너무 닮아서’일까? 왜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타인과 세상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길인지 용과 돼지의 코를 떠올리며 생각해 보면 어떨까?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폄훼(貶毁)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유서(遺書)를 한번 읽어보면 참전계경의 포용에 대한 가르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천만 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정의당과 나를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이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국민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2018.7.23. 노회찬 올림”
투사(鬪士)라는 말이 있다. 분명 노회찬은 약자를 위한 투사였다. 그는 언제나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한 없이 약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투사라는 단어는 상대와 싸우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리고 종교적인 투사도 있다. 잘못된 제도와 관행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인데 개혁이라고 표현한다.
마르틴 루터는 중세 기독교의 잘못된 관행과 가르침을 바로잡기 위해 종교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자신을 체포해 제거하려는 거대한 집단과 싸워야 했다. 다행히도 뜻을 같이하는 보이지 않는 손길들을 통해 도움을 받고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만다.
이같이 그릇된 현실을 바로잡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그게 어떤 방법이 됐든 쉽지가 않다. 그래서 그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서 외롭고 의로운 투사가 되어야 하는 거다. 그릇된 현실과 맞서며 바로잡으려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매사 투사의 자세를 취하게 되고 인간관계는 자칫 팍팍해질 수 있다.
노회찬 의원이 바로 강자의 불의에 맞서고 약자 편에 서서 싸우려니 자연 투사가 된 것이다. 그는 유서에서 진실을 고백했다. “드루킹의 경공모로 부터 모두 4천만원을 받았다”고 잘못을 시인했다. 그는 “경공모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고 자책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노 의원이 자신에게 내린 최종형량은 ‘목숨’이었다. 그야말로 몇십억, 몇백억을 해먹고도 눈도 깜짝 안하는 비정한 정치판에서 4천만원을 받은 양심 때문에 목숨으로 사죄한 그를 그 누가 욕을 할 수 있겠는가?
노 의원은 지금껏 지켜온 양심의 명령에 따라 스스로 심판대로 오르고 말았다. 평생 헌신했던 진보정당이 안착하는 상황을 원내대표인 자신이 망칠 수 있다는 자괴감도 그의 양심을 괴롭혔을 것이다. 세간엔 노 의원의 죽음을 그동안의 정치자금 관행이나 사회 주류층의 병리적 행태에 비추어 과도한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대세다.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심정의 반영이 아닐까 싶다.
의로운 일에 고난과 굴곡이 많은 역사는 만고에 영예(榮譽)로운 것이다. 그러나 불의하거나 환락(歡樂)에 젖었던 역사는 만고에 부끄러움만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