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68주년④] 백마고지 전투 영웅 김종오 “나와 같이 여기 뼈를 묻자”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 남침을 개시하였을 때 38선에 배치된 4개 사단 중 김종오의 6사단만이 적의 침입을 지연시켜 서울의 우익으로 진공하려던 북한군 2군단의 진출을 지체시켰다.

격노한 김일성은 군단장 김광협을 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키고 동북항일연군의 맹우 최현을 군단장으로 임명하였다. 6사단은 수도권에 집중될 수 있는 적의 공격을 3일 동안 저지함으로써 김홍일의 시흥전투 사령부가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춘천전투는 오늘날 춘천회전으로까지 불린다.

춘천~홍천 전투에서 적을 지연시킨 김종오의 6사단은 음성군 동락리~무극리 전투에서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던 인민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 사살 1천명, 곡사포 14문을 노획하는, 개전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여기서 노획된 장비는 유엔에 소련군의 개입을 증거할 수 있는 결정적 증빙자료가 되었다. 6·25전쟁 초기에 지연전을 성공시킨 김종오의 전공은 실로 컸다.

북진기간 동안 6사단은 전군의 선두에서 초산에 진출하여 이대용 소대장이 압록강 물을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 바쳤다. 국군은 바야흐로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중공군의 침공으로 전쟁은 이후 2년여를 끌었고, 6·25전쟁은 사실상 ‘미니 세계대전’이 되었다.

김종오는 1952년 10월, 9사단장으로서 휴전회담 중 최대의 진지전인 백마고지 전투에서 열두 차례나 뺏고 뺏기는 혈전에서 중공군 제38군의 대공세를 막아내었다. 9사단은 5만5천발 이상의 적 포탄 세례를 받았고 미 9군단 포병은 48만5천발 이상의 포탄을 퍼부어 9사단을 지원하였다.

중공군 38군은 1만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9사단도 총 사상자가 3500명에 달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9사단 장병들이 보여준 투지는 국군 장래에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서,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의 극찬을 받았다.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는 김종오 사단장의 적절한 예비대의 투입 및 부대교체가 결정적인 요소였다.

특히 김종오 사단장의 피를 토하는 훈시는 사단 전 장병을 격앙시켰다.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살수에서 장사시킨 을지문덕 장군과 당태종의 삼십만 대군을 물리친 연개소문 장군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사단 전 장병은 나와 같이 여기에 뼈를 묻자!”

휴전 후 김종오는 군단장, 육사교장, 교육총본부 총장, 1군사령관을 거쳐, 5·16 후 장도영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조국을 위해 몸과 혼을 다 바친 김종오는 1966년 45세로 ‘반드시 조국 통일을 이루시라’는 비원을 박정희 대통령에 남기고 영면하였다.

김종오는 충남 청원 출신으로 일본의 중앙대학을 다니다 소집된 학병 출신이었다. 중일전쟁 이래 전쟁에 휩싸인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상당히 유족한 집안이었고, 비교적 영어도 잘 할 수 있어서 일본 육사 출신의 노병에 비해 고문관과의 적응도 빨랐다.

춘천회전, 백마고지전투의 영웅 김종오 장군은 국군사에 찬연히 빛나는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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