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68주년③] 신성모 국방-채병덕 총장 ‘최악의 콤비’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강교 조기 폭파는 채병덕 참모총장의 책임이지만, 여기에는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독촉이 심했다. 장관의 명령은 정무적 명령이고 이를 집행하는데는 군인으로서 채병덕의 판단이 필요했다. 장관이 시킨다고 이를 현장 책임자에게 그대로 전달만 해서야 어찌 참모총장이라고 할 것인가?

신성모는 낙루장관(落淚長官)으로 불린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할 때마다 울어서다. 존경의 염이 과도해선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선지 자기 주체를 못하는 인간이었다. 북한이 침공하면 바로 반격하여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는 신성모의 허풍은 공연히 미군들의 의심만 사게 만들어 한국군에 대한 무기 공급만 제한하게 만들었다.

1950년 에치슨 국무장관 방한 시 채병덕과 함께 38선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사진은 한때 북한이 국군의 북침설을 뒷받침하는 선전자료로 이용되었다. 신성모는 전략적·정무적 판단력이 제로(0)였다.

영국에서 오래 생활한 신성모는 일요일에는 전화를 받지 않는 고급 취향(?)을 가졌다. 1950년 6월 25일도 일요일이었다. 북한군 남침을 보고하는 육군본부 전화를 신성모는 받지 않았다. 부관 왈 “장관님은 일요일에는 아무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였다. 상선 선장으로서 전화를 받지 않는 것도 마땅치 않을진대 국방부장관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장창국 작전국장의 집에는 전화가 가설되어 있지 않았는데 시가지를 돌며 부대 출동을 독려하는 방송을 듣고 육본에 들어 왔다.

모든 문제의 시발은 신성모를 국방부 장관으로 쓴 이승만의 판단력이다. 신성모는 영국 상선에서 오래 근무해서 영어는 잘했다. 그 외에 무슨 장점이 있는가? 군사에 대해 아는가? 군 인맥에 정통한가?

신성모는 ‘낙루장관’ 이 한마디로 폄하되지만 그 밖에 그의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그러나 그의 이력은 간단하지 않다. 그는 1891년생으로 경남 의령 산이다. 1910년 보성법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국치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채호·안희제 등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오송상선학교와 남경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해군 소위로 해군원수부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영국에서 항해학교를 나오고 1930년대에는 영국과 인도를 오가는 정기 여객선의 선장으로 활약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 군사위원이 되었다. 즉, 그는 ‘낙루장관’ 한마디로 폄하하기에는 간단치 않은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시기 국방부장관이라는 자리가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다.

신성모, 채병덕은 최악의 조합이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이 왜 이런 판단밖에 못하였는가? 국운이 그밖에 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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