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김종필, 5·16·DJP연합·지역주의 통해 ‘최장수 2인자’···’공과’ 엇갈린 평가

<사진=뉴시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김종필 전 총리가 23일 타계했다. 3김 중 김영삼, 김대중의 시대는 있었으나 김종필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그는 “정치는 허업”’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그만큼 많은 일, 큰 역할을 한 정치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박정희가 없는 김종필은 물론 생각할 수 없으나, 김종필을 제외하고 박정희의 功과 過를 논할 수도 없다.

김종필은 5·16을 설계하였으며, 혁명정권 수립과정에서 악역을 맡았다. 혁명공약은 4·19선언문을 쓴 이수정에 비길만한 명문이다. 짚어야 할 것을 분명히 짚었다. 장도영에 은혜를 입어 주저하는 박정희를 밀어붙여 장도영을 제거했다(7·2사태 先斬後報).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정권을 옹위하고 새 정치를 밀어나갈 공화당을 창당했다. 경제건설을 위해 불가결한 한일회담을 타결지었다.

과거사 문제, 독도 문제, 청구권을 일괄 포함해, 김-오히라 메모로 결말을 지었으나, ‘自意半 他意半’으로 세상을 주유하였다.

JP의 시대는 결국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각제에 대한 그의 소신은 아직 화두를 던지고 있다. YS, DJ와 내각제를 연대로 합쳤다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내각책임제에 대한 그의 소신은 여전하다. 한사람에게 모든 것을 依託하는 대통령제보다 여럿이 ‘나누고 합치는’ 내각제가 민주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제기한다.

JP는 “국민은 호랑이다”, “열번 잘해도 한번 못하면 물어뜯는다”고 정치의 본질을 갈파하였다.

JP는 휴머니스트였다. 정치인의 품격을 높였다. 충청인의 의미를 되새기게끔 만들었다. 고인은 사무사(思無邪)를 평생의 지표로 삼았다.

국무총리 JP의 국회답변은 완벽했다. DJP의 한계 내에서 국정의 모든 문제에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대처 수상의 의회 연설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김종필은 임동원은 용납하지 못 했다. 이것이 DJP의 성격이고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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