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삼난’ 돌파해 ‘삼도’를 얻으시라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오늘은 불기 2562년 석가탄일이다. 삼난돌파(三難突破)라는 말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불법을 만나기 어려우며,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났으나 직접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이다.

불일(佛日)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펴낸 <수심결>(修心訣) 37장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실위맹구우목 섬개투침’(實謂盲龜遇木 纖芥投鍼)이라는 대목이다. ‘눈먼 거북이 나무를 만나고, 작은 겨자씨가 바늘에 꽂힘과 같으니, 인간으로 태어난 다행함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라는 뜻이다.

특히 ‘맹구우목’보다는 ‘섬개투침’이라는 말이 조금은 생소할 것이다. 섬개투침은 겨자씨를 공중에 던져놓고 바늘을 던져 그 겨자씨를 관통시킨다는 말이다.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 잘 모르지만 그만큼 사람 몸을 받기가 어렵고 정법(正法)을 만나거나 깨달은 성자(聖者)를 만나기가 참으로 쉽지 않다는 의미다.

그럼 ‘맹구우목’은 무엇일까요? <잡아함경>(雜阿含經) <맹구경>(盲龜經)에 나오는 얘기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산책하시다가 문득 아난다에게 물으신다. “아난다야, 큰 바다에 눈먼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이 거북이는 백 년에 한 번씩 물 위로 머리를 내놓고 숨을 쉬는데 그때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나면 잠시 거기에 목을 넣고 쉰다. 그러나 판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냥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때 눈먼 거북이가 과연 나무판자를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다는 “그럴 수 없습니다”고 대답한다. 눈까지 먼 거북이가 백년 만에 머리를 내밀 때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난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래도 눈먼 거북이는 넓은 바다를 떠다니다 보면 서로 어긋나더라도 혹시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중생이 육도윤회(六道輪廻)의 과정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란 저 거북이가 나무판자를 만나기 보다 더 어렵다. 왜냐하면 저 중생들은 선(善)을 행하지 않고 서로서로 죽이거나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해쳐서 한량없는 악업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比丘)들이여, 너희들은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내가 가르친 ‘네 가지 진리(四聖諦, 苦集滅道)’를 부지런히 닦으라. 만약 아직 알지 못하였다면 불꽃같이 치열하게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이렇게 이 세상에 태어나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런데 어찌 사람들이 이 진리의 말씀을 외면하고 지옥생활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 중생들은 그릇이 작은지라, 없던 것이 있어진다든지 모르던 것이 알아지고 보면 곧 넘치기가 쉽다. 그리고 가벼이 흔들려서 목숨까지 위태롭게도 한다.

그러나 불보살(佛菩薩)들은 그 그릇이 국한(局限)이 없는지라, 있어도 더한 바가 없고, 없어도 덜할 바가 없다. 그래서 불보살의 살림은 유무를 가히 엿보지 못하므로 그 있는 바를 온전히 지키고 그 명(命)을 편안히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희노애락’에 끌려서 마음을 쓰는 것이 우리네 중생이다. 그래서 이로 인하여 자신이나 남이나 해를 많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희노애락을 초월하여 마음을 쓰므로 이로 인하여 자신이나 남이나 해를 보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에 적공(積功)하여 공부가 최상 구경(究竟)에 이르고 보면 세 가지로 통함이 있다.

첫째, 영통(靈通)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지 아니하여도 천지 만물의 변태(變態)와 인간 삼세의 인과보응을 여실히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 도통(道通)으로, 천조(天造)의 대소(大小) 유무(有無)와 인간의 시비(是非) 이해(利害)에 능통하는 것이다.

셋째, 법통(法通)으로, 천조의 대소유무를 보아다가 인간의 시비이해를 밝혀서 만세 중생이 거울하고 본뜰 만한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세상에 아무리 큰살림이라도 하늘 살림과 합산한 살림 같이 큰살림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큰 사람이라도 하늘 기운과 합한 사람같이 큰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이 ‘삼통’을 한 사람은 천상락(天上樂)뿐 아니라 인간락(人間樂)도 아울러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인간락은 결국 다할 날이 온다. 온 것은 가고 성(盛)한 것은 쇠(衰)하며, 난(生) 것은 죽는(死) 것이 천리의 공도(公道)이기 때문이다. 비록 천하에 제일가는 부귀공명을 가졌다 할지라도 노·병·사의 앞에서는 저항할 힘이 없다. 죽을 때에는 일평생 온갖 수고와 온갖 욕심을 다 들여 놓은 처자나 재산이나 지위가 다 뜬 구름같이 흩어지고 만다.

하지만 천상락은 본래 무형한 마음이 들어서 알고 행하는 낙이다. 비록 육신이 바뀐다 할지라도 그 낙은 여전히 변하지 않게 된다. 비유하여 말하자면 이 집에서 살 때에 재주가 있던 사람은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갈지라도 재주는 그대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몸을 이생에 제도 못하면 또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겠는가.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