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의 범죄사회학] 군인과 경찰이 부패하면?
무인武人의 실적제 변질
[아시아엔=김중겸 전 경찰청 수사국장] 독일은 무사(武士)에게 실적주의를 철저하게 적용했다. 전쟁터 나가 공을 세워야 예우 받았다. 이 원칙은 기사에게도 적용됐다.
어려서부터 기사 후보생으로 예의를 배우고 검술을 훈련한다. 생애 최초로 참전하는 초진(初陳) 기다린다. 깃을 단 깃발(pennon)을 등에 달고 나간다. 내가 벤 적의 목(首級) 있으면 꼬리 없는 깃발(banner)을 단다.
승전 기념식에서 주군이 무사 어깨에 칼을 댄다. “Stand up! Sir. 아무개.” 하면 기사된 거다. 황금박차(gilt spur)를 찰 자격을 준다.
낙하산 없을 리 있나
공도 안세우고 된 기사, 요즘말로 치면 채용비리다. 전쟁터가 아니라, 양탄자 위에서 기사된 자(carpet knight)라 하여 내내 놀림거리가 된다.
장교자리 구입은 영국에서 Cardwell의 1871년 군 개혁 때까지 계속됐다. 육군 장교는 귀족 가문에서 샀다. 병사는 해외파병이 많아 즉 죽을 기회 많아 웬만한 장정은 기피했다. 하위층으로 채웠다.
강제모병 전문가(pressing gang)이 실업자, 부랑자를 감언이설로 꾀었다. 술 먹이고 취할 때까지 마시게 했다. 몸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면 징병수당(pressing money) 손에 쥐어 주었다. 계약 성립이다.
물론 수당에서 비용 즉 술값은 공제하여 제 포켓에 넣었다. 상류층 자제에게도 그렇게 했다. 정작 데려가지는 않았다. 부모에게서 그 돈의 몇 배나 뜯어낸 다음에 계약 해지했다.
예나 지금이나 빽!
그래도 모자랐다. 죄수들을 외국에 가서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석방한 후 입대시켰다. 외국인으로도 채웠다.
해군은 좋은 집안 자제를 승선시켰다. 선장이 지도해 장교로 키웠다. king’s letter boy다. 왕의 추천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포츠머스해군학교 입학이다. 해상실습 마치고 선장의 구두시험에 통과하면 장교로 임용됐다. ship’s boy다. 현장에서 배운 자라는 의미다.
낙하산 장교(courtly captain)도 있었다. 부모 배경으로 장교 된 자다. Admiralty(제독)을 우습게 알고 건방지게 굴었다. 수병들은 배에 대하여 일자무식인 그들을 경멸했다.
군대 안 가려면 돈 내야
수병(seaman=blue jacket)은 지원자를 받았다. 부족하면 육군과 같은 방법 썼다. 나중에 ship’s boy가 수병양성제도로 변질했다. 배에서 먹고 자고 일하다가 18세 되면 3등 수병 됐다.
19세 중반 크리미아전쟁 때까지도 군행정은 주먹구구식이었다. 일선장병에게 왼쪽 군화만 보냈다. 오른 발은 맨발이었다. 1906년에 가서야 참모본부(General Staff) 설치됐다. 비로소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전쟁나면 장정은 다 나가야 했다. 나가지 못하면 세금 냈다. 우리나라도 군역에 못나 가면 군포 냈던 시대 있다.
서양에서는 병역면제세금(scutage)을 냈다. 또는 사람 사서 대신 내보냈다. 대립(代立)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시나 평시를 불문하고 돈으로 해결했다.
War and Poor People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이나 북이나 지원병으로 싸웠다. 전쟁 길어지자 병력 모자랐다. 모병관이 유럽 출장. 입대지원하면 이민허가 떨어졌다. 너도나도 응모. 살려고 미국 가서 전쟁터에서 죽었다.
1864년 열일곱 살 헝가리 소년. 살기 힘들었다. 군에 들어가 의식주 해결코자 했다. 유대인 곡물상 집안이었다. 아버지가 돌연 사망,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시력이 형편없었다. 체격도 나약했다. 군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독일까지 유랑해 미국 북군 모병관 만났다. “오케이! 지원하겠습니다.”
미국군인 된 이 소년은 남북전쟁 끝난 후 고생고생 끝에 신문왕이 됐다. 바로 조셉 퓰리처다.
300달러면 군대 안 간다
그래도 부족해 징병제 도입. 북부는 노동자 1년 소득인 3백달러를 정부에 내면 면제. 남부는 흑인노예 20명 내고 안 갔다.
부자들이 일으킨 전쟁(a rich man’s war and a poor man’s fight). 빈자들이 나가 싸웠다. 돈 없고, 힘없는 아들만 죽었다.
1863년 7월 12일 뉴욕. 1차 징집자 명단 나왔다. 대부분 돈 없는 아일랜드와 독일 사람이었다. 하루살이 품팔이로 연명했던 장정들이었다. “군대 가서 죽으라고! 내 가족은 굶어 죽으라고!”
없는 설움이 폭동으로
돈 없어 군대 가야 한다. 내 자식과 마누라는 어떻게 살아야 하냐. 부모는 누가 모시냐. 가슴에 응어리 들어앉았다.
1863년 7월 13일 월요일. 2차 징집자 명단 발표. 또 우리 아일랜드 사람이다! 울분 폭발. 나흘간 이어진 뉴욕징집폭동(New York Draft Riots)! 공화당 인사를 습격하고 신문사와 경찰서 파괴했다. 나흘 동안 계속됐다. 군대동원해 강제진압했다.
링컨정부의 상처가 컸다. 징집 기피 12만명. 캐나다 도주 9만명. 헌병 손길 피해 산속으로 들어간 장정 3만명. 20만명 탈영.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 한국전쟁 때 최하 소득계층 미군 전사비율은 최상층의 4배에 달했다. 흑인은 백인의 2배. 우리네도 그때 있는 집 자식이야 미국유학 갔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다. “부자가 전쟁 일으키면 죽는 건 가난한 사람이다.”(When the rich wage war, it is the poor who die.)
3백 달러가 또 요긴한 곳
뉴욕 민주당 지구당사무소(Tammany Hall)에 소개받아간다. “경찰관 취직 좀 시켜 주세요.”
“누가 보냈어?” “존 존스씨입니다.” “알았어. 3백 달러 가져 왔지? 이리 내.” 돈 건네면 채용은 따 놓은 당상. 당파와 연줄의 결과다.
곧바로 경찰서에 간다. 어디 아프다고? 소학교도 안 나왔다고? 이름은 쓸 줄 알지? 그럼 됐어. 전과자? 그럼 어때.
유니폼 없다. 신임 순경교육이 어디 있나. 없다. 배지와 경찰봉은 받는다.
집이 어디야. 근무지를 집 가까운 곳으로 해줄까. 먼 곳으로 해줄까. 먼 곳? 그럼 자네 순찰구역(beat)은 브루클린이야. 거기 담당경사(sergeant)에게 신고해. 바로 가. 근무 시작!
1800년대 뉴욕시경 모습이다. 공장 근로자 연봉 3백달러, 순경 9백달러. 경찰관 되었다는 건 출세다. 신분상승의 증거였다.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의 도시는 다 이런 상태. 선거에서 공화당이 이겼다. 민주당 때 채용된 경찰관은 모두 목 날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