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덮인 홍천 약수산에 90살 청춘이 묻히고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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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캠프나비 대표] 매서운 바람 뚫고 눈길을 헤치는 노인. 푹푹 빠지는 눈길을 지나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올 겨울 들어 눈 풍년은 아직 없지만 구룡령을 휘감고 도는 백두대간 후미진 곳엔 엄청난 눈이 쌓여있다. mg_2983

무릎까지 쌓인 눈이 러셀로 헤쳐나가는 이 할아비를 꼼짝도 못하게 붙잡아 끈다. 눈을 감고 잠시 예전의 나의 화려하고 용맹스럽던 산꾼을 떠올리며….

너는 지금 몇 살인가? 내게 물었다. “낡아빠진 몸 이끌며 헐어빠진 등산화로 나이를 짓밟고 뭉개고 득달같이 나아가는 마음의 행로가 내 나이다” 하고 외치는 내면의 소리가 들려온다.mg_257

즐거움의 허덕임도 잠시… 예전 같지 않은 노인의 발 힘은 그러하다 치고 엉치뼈가 엉덩이와 어긋난 듯 시큰거린다. 온힘을 다해 억지를 부려 까치걸음을 해보지만 소용없는 일. 고생스럽지만 즐거움에 빠진다는 게 바로 이런 거 싶다.

깊은 눈에서 길을 만드는 것은 체력과의 싸움이다. 산에 올라가기도 전, 초입에서 이렇게 한심하게 당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향해 솟구친 금강송의 無心을 알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간 내 마음으로 만사를 분별하여 보고 말한 것들이 부끄러웠다.

눈꽃 정원에 서니 번뇌와 망상은 사라지고….

한천(寒天)의 싸늘한 구름과 맑은 새소리만이 눈꽃 정원의 주인이다. 이 할비는 그 장엄한 눈꽃 황천(荒天)에 증발돼 아름다움조차 말할 수 없는, 대책 없는 아름다움의 적막이 무섭기까지 하였다. 이 대목에서 죽지 말라고 해도 죽어버리는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행하는 존재의 모든 것이 삶일 뿐이니 지금의 이 순간을 애처로이 그리고 허망을 넘어 바라본다.

눈밭 얼음 속을 헤매는 고난도의 즐거움!! 웅장한 백두대간 산줄기에서 뻗어 내려온 심산유곡의 통바람 골짝은 눈과 얼음으로 하얗게 떨고 있다. 겨울에 눈 구경 하려고 많은 이가 찾아드는 관광지와는 달리 이곳은 태고로부터 여태 인적이라곤 전혀 볼 수 없는 족제비, 토끼, 수달피, 산돼지들만의 고향.

이곳을 걷는 동안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始原을 걷는 기념비적인 큰 놀라움과 앞으로 몇날이나 이 짓으로 기쁨을 사랴? 하는 맘이 교차한다. 앞을 바라보니 난감하고 뒤를 돌아보니 후회는 없다. 길 잃지 않고 산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훤히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오지에 들어 ‘사람과 자연’ 저널리스틱한 욕구가 내게 다가와 가슴을 방망이질 한다.

숲 속을 걸으며 자주 보아왔던 주변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북쪽으로 정수리가 하얀 눈 덮인 해발 1306m 홍천 약수산 골짝에 거적움막에 의지해 혼자 사는 털보 ‘조병덕’(55세)이 있다. 그는 “핸드폰을 갖고 살면 사람 버린다”고 한다. 더 이상 후회 없이 살겠다며 느리고 후미진 삶을 택했단다.

약초를 수집해 생계를 겨우겨우 꾸려가는 조병덕 심마니는 인생이란 어디에 묻힐는지 아득한데 먼 산에 조각구름 보는 것만으로도 과분하단다.

자기 마음 둘 곳 없는 도시의 배운 사람들에게 이것이 사는 길일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나는 지금 보내고 있다.

“늙어만 가는 이 가슴에 봄이여 오라…” 혹한 속 눈더미에 쌓인 버드나무 가지에서 콩알만한 솜털버들강아지가 솟아올라와 오들오들 떨고 있다.

“아~ 봄이로구나!!” 이 깊은 산속은 이 세상이 아닌 듯 겨울과 봄이 교감하는 생명의 신비에 놀랐다. 겨울과 봄이 서로 저항하며 겨울 쪽과 봄 쪽이 날을 세워 치열하게 다툰다. 봄의 고향은 버들강아지, 눈은 겨울을 먹고 산다.

그 출생의 근원에서 서로 더불어 수줍어하는 자연의 첨예한 접점을 찾아 유람하는 이 노병은 얼마나 행복한가!ds2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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