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고려·조선의 민초들 살펴준 홍성 ‘용봉산 불상’의 천년 미소
[아시아엔=범상 스님, 홍성 석굴사]?깊은 산 중 조그만 절. 눈 많이 내린 어느 해 준비해 둔 땔감이 떨어져 방에 불을 지피지 못해 밤새 추위에 떨었다. 새벽 예불을 하러 법당에 올라갔던 스님들은 아연실색 했다. 모셔진 목불(木佛)이 사라진 것이었다. 한 바탕 소동이 일었고, 천연선사의 방은 불을 지펴 따뜻한 것을 알았다. 스님들이 몰려가 부처님을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힐난했다.
천연선사는 딴청하며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뒤적거렸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사람들은 무슨 짓이냐며 다그쳤다. 천연선사는 천연덕스럽게 “부처를 태웠으니 사리를 찾는 중이오.”라고 일갈했다. 사람들은 “예끼 여보시오 나무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다는 말이오?” 했다. 천연선사는 “아궁이에 나무를 지폈을 뿐인데 왜 이리 난리시오”라며 방으로 들어갔다. 천연선사는 남은 불상을 쪼개 땔감으로 사용했다.
많은 사람들은 정성들여 불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한다. 분명 무엇이 잘못된 것 같아서 큰스님께 여쭈어 본다. 하나같이 시제불교(是諸佛敎) 모든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대답하신다.
불상은 나무, 돌, 철, 흙, 종이 등 다양한 소재로 만든다. 거기에는 신성(神聖)이나 생명이 없다. 다만 중생들의 마음에 연(緣)하여 믿음의 대상으로 받들 뿐이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건네는 장미 한 송이에 감동을 느끼고, 영원히 변치 않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결혼의 증표로 간직하듯이 말이다.
여기에 대해 붓다는 “나의 가르침은 뗏목과 같으니 강을 건넌 다음에는 버리는 것이 마땅치 않는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천연선사는 이미 강을 건넜으니 뗏목이 필요치 않고, 중생은 강을 건너야 하니 불상이라는 뗏목이 필요하다.
용의 기상과 봉황의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용봉산(龍峯山)의 불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용봉산의 옛 이름은 팔봉산(八峯山)이다. 八이라는 숫자는 ‘사방팔방’을 의미하므로 팔봉산은 산이 지녀야 할 모든 것을 갖추어 주변에서 가장 빼어나다는 뜻을 가졌다.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바다와 맞닿고, 앞에는 너른 평야를 두고 있으며 기암괴석이 뻗어 있어 내륙의 등대로서 민초들을 품어왔다. 용봉산에는 유독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 많다.
부처님을 향하는 신심(信心)도 신심이겠지만 농경어로사회에서 갯벌이 발달된 바다와 너른 들판이 만들어내는 경제력은 큰 불사(佛事)를 일으키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좋은 땅은 탐이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땅이 가지고 있는 생산력만큼 전쟁과 다툼이 잦았고 민초들 삶은 한층 더 고단했을 것이다.
힘이 들 때는 기댈 곳이 있어야 하고 메시아를 기다려야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다니는 길목마다 장승과 벅수를 세우고 성황당을 지나면서 하루의 안녕을 빌었으며, 현재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불보살을 찾았다. 괴로움 없는 극락정토를 염원하고 자식들의 행복을 위해 미륵불의 하생을 기다리며 바위를 쪼아 신령스런 불상을 새겼다.
야외에 세워진 불상은 중생들의 간절한 희원(希願)이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용봉산의 불상들은 감히 다가서기 어려운 뚜렷한 형식미(形式美)보다는 아무 때나 격식 없이 기댈 수 있는 투박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낙이 미륵불의 코를 갈아먹었고, 돼지머리에 막걸리 한 사발 따르며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여기에는 종교도 특정한 교리도 없다. 다만 그 어떤 것도 받아주고 행복을 열어주는 존재로서 부처님이 있었던 것이다.
스님들은 중생들이 내려놓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받아주고 각자의 그릇만큼 지혜를 가르치고 복을 쌓게 하여 무지(無智)가 만들어내는 괴로움을 거두어 준다. 그렇게 용봉산의 불상들은 천년 세월동안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뗏목으로 만고풍상 속에서 여전히 연꽃을 피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