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순의 초경의 뜰④] 중년 여성의 목숨 건 사랑···그냥, 미친 사랑에 빠진 거다

이영미 감독은 중년 여성의 성적 욕망을 아름답게 풀어낸 ‘사물의 비밀’을 연출했다. 기자간담회에서 이 감독 모습.

[아시아엔=김유순 수필가] 여자 나이 삼십이면 인생 끝난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여고 시절, 가톨릭계 사립학교 여선생들은 결혼과 동시에 사직한다는 각서를 썼고, 삼십 넘은 여선생은 퇴물 취급을 당했다.

그러다 보니 기숙사 사감과 수녀 선생님 빼고는 대부분의 여선생님들이 이십 대 청춘에 학교를 떠났다. 그래서인지 내 인식 속의 중년 여자는 아름답지도 멋있지도, 더 이상 ‘여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막상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고 보니, 그래도 청춘 같은 ‘여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늙는 병과 죽는 병은 어쩔 수 없으니 오직 한 길,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익어가는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비밀을 알지 못하는 중년 여자는 슬프다.

몸은 스러져가는데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니, 이야말로 에덴의 축복을 상실한 하와의 형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는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오십 년을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독신으로 숨어 살다가 죽었다. 젊음을 향한 지나친 집착은 그녀를 고독이라는 혹독한 감옥으로 밀어 넣었던 거다.

한편, 시간의 흐름에 맞장 뜬 중년 여자들은 인위적으로 젊음을 위장하거나 자신을 ‘여자’로 인정해주는 사랑에 목말라 한다. 따라서 아내이기 이전에 여자이고 싶고, 엄마이기 이전에 여인이고 싶은 중년 여자의 욕망은 때로 목숨 건 사랑으로 치닫는 위험성이 있다.

앞뒤 좌우가 안 보이는 중년 여자의 거친 사랑은 인생의 모든 것을 담보로 거는 용기가 있다. 이에 비하면 중년 남자의 부드러운 로맨스는 때로 비겁하다.

랑콤을 비롯한 23개의 글로벌 브랜드를 가진 화장품 기업, 로레알의 소유주이자 유럽 최대의 갑부인 릴리안 베탕쿠르 여사는, 유일한 상속녀인 외동딸이 자신을 정신병자 취급해서 법정에 세우고, 세계 언론이 가십 거리 삼아 조롱하는 가운데, 사십 년 동안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스물여섯 연하의 사진작가에게 1조 5천억을 선뜻 물려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주름 하나 없이 탱탱한 모델들을 내세워 화학성분 섞인 화장품이 마치 젊음의 묘약인 양, 행복한 거짓말로 온 세상 여자들을 속였지만, 정작 자신의 무너지는 젊음 앞에서 절망해 있는 그녀에게, 직설법이 아닌 은유법으로 여전히 ‘아름다운 여자’임을 확인시켜 주는 젊은 사진사의 속삭임이 거짓이든 사기든, 1조5천억이든, 주변의 쑥덕거림인들, 뭐 대수겠는가.

그냥, 미친 사랑에 빠진 거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나마르테토스’

‘너희 중에 죄의 유혹을 한 번도 받지 않은 자는 돌로 치라’는 뜻이다.

누가 그 사랑에 돌을 던지랴.

죄 가운데 빠져 어둠의 종노릇하는 인간의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이 따른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모하다’는 히브리어로 ‘테슈카’인데, ‘집착하고, 매달리고, 요구한다’라는 끔찍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숙명적으로 집착하는 여자, 그것도 젊음과 늙음의 귀로에 서서, 우렁이 새끼가 어미 살 파먹고 자라듯이, 이제는 다 컸다고 껍데기만 남겨놓고 휭 하니 떠나가는 매정한 자식들과 돌덩어리 대하듯 무신경하게 바라보는 중년 남편의 메마른 눈길 속에서 중년 여자는 아프게 고독하다.

게다가 여성 호르몬의 고갈로 인해 공격적으로 변하는 중년 여인의 사랑은 사모할 대상을 찾는 순간, 간혹 목숨도 던지고 가정도 던지고 자식도 던져버린다.

이 무모한 사랑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밖에 없다.

다섯 남자를 남편으로 두었어도 여전히 목말랐던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 배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넘쳐흘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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