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 시진핑에게 묻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박근혜에게 ‘음수사원’을 말했소?”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에 시진핑 주석이 김구 선생 아들인 전 주중대사 김신 장군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남긴 휘호 음수사원(飮水思源)으로 중국이 한국에 준 은의(恩誼)를 상기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장개석 총통과의 일이고 중국공산당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중국이 지난해 9·9절이 항일전 전승기념일이라 한 것도 우습지만 이번의 삽화도 비슷하다.

1992년 노태우 정부에서 중국과 국교를 맺을 때 우리 외교부가 취한 행동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명동의 중국대사관에서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가 내려지는 비통한 시점에 나와 현장을 지켜본 우리측 인사는 없었다. 타이페이의 한국대사관에서는 군부대의 하기식 정도의 의식도 없이 태극기를 내려 말아왔다고 한다. 참으로 한심한 외교부 직원들이다. 남녀가 헤어질 때도 “Lets part in friends, not in anger”라고 하는데 국교단절을 그런 모양새로 하다니···.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이 일시 헤어지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했어야 옳았다. 중국인은 예의염치를 중시한다. 과거에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던 한국인이 이런 경우 없는 짓을 했다는 것은 대단히 부끄럽다. 외교관들이 고시에 합격하고 미국에서 공부는 했지만 인간의 본분에 대한 교양은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 드러난다. 중화민국에서 공부한 학자도 꽤 있는데 대만과 단교한 이후 관계를 유지하는 인사가 별로 없는 것은 유감이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장개석 총통은 이은보원(以恩保怨)의 정신으로 일본인을 보냈다. 청일전쟁·만주사변·중일전쟁에 걸쳐 일본이 중국에 끼친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기들이 해온 바를 알고 있는 일본인은 전전긍긍했다. 일본군이 국부군에 항복은 했더라도 중국 민중이 “왜괴(倭鬼)를 찢어죽이라”고 폭도로 변하면 중국 정부로서도 방법이 별로 없었다. 패전한 나라의 백성은 그저 처분만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장개석 총통이 나서서 “중국은 대국으로서 오히려 원한을 은혜로 갚자”고 호소했다. 중국인은 그 호소에 따랐다. 수백만의 일본인, 특히 아녀자들이 다치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다. 1972년 일중 수교가 이루어질 때 무엇보다도 뜻 있는 일본인들은 장개석 총통의 그 은혜에 답하지 못하는 것을 죄송해 했다고 한다.

중공군은 1950년대에 다된 한국 통일을 가로막았다. 이것은 한국인에게는 철천지한(徹天之恨)이다. 시진핑이 음수사원을 들먹일 자리가 안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국분단 지속의 근원은 중국이라는 것이다. 역사를 잊는 국민은 치욕을 당한다. 홍콩에서 독립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영국이 1997년 홍콩을 돌려줄 때 중국이 약속했던 일국양제(一國兩制)가 구현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홍콩인들의 불만이 증대되고 있다.

1943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중국 장개석 총통 3거두가 모인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 총통이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장개석 총통이 한국 독립을 주장한 것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를 접하고 “4억 중국인이 못한 것을 조선의 청년이 이루었다”고 충격과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을 먹으면서 거슬러 원천을 생각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단, 경위(經緯)가 분명히 맞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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