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채수일 한신대총장 ‘사랑이란?’③] “사랑 없는 정의는 잔인하고, 정의 없는 사랑은 진부하다”
[아시아엔=채수일 한신대 총장] 참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종교보다 더 위대하고, 종교보다 더 진실한 사랑이 아주 작은 일,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른바 신적 사랑이라는 ‘아가페’와 인간적 사랑이라는 ‘에로스’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인내, 온유, 시기하지 않음 등은 구체적으로 사랑을 내용적으로 규정한다. 사랑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다. 사랑은 윤리 이상의 것이지만 그렇다고 윤리를 초월해있지는 않다. 사랑은 구원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이다. 사랑이 오래 가면 변하는 것이 많지만, 허물없는 사이가 되면 될수록 서로 예를 지키지 않게 되는 것이 그 변화의 하나다.
사랑하니까 함부로 해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이 마침내 습관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결코 무례히 행할 수 없는 법이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은 ‘남몰래 음모를 꾸미지 않으며’라는 뜻을 시사한다. 악한 생각은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음모라는 행위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에 대하여 기뻐’한다. 사랑이 개인적 차원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성령의 은사인 사랑의 열매는 개인적 관계를 넘어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다.
바울에게 사랑의 사회적 형태는 분배의 정의, 비폭력, 빵과 평화였다. 사도 바울이 사랑을 개인적 차원에서만 규정했다면 그 때문에 밀고를 당해 사형에 처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과 정의는 함께 가야 한다. 사랑 없는 정의는 잔인하지만, 정의 없는 사랑은 진부하다. 사랑은 정의의 심장이며, 정의는 사랑의 사회적 형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라는 말은 ‘모든 것을 지탱하며’라는 뜻이다.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사랑에서 온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들에 대해 언제나 가장 좋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깊은 절망에도 불구하고 ‘결코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바라며’도 인간성에 대한 깊은 실망에도 불구하고 ‘결코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는 말은 곤경이나 거절 때문에 사랑이 사랑이기를 결코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없어질 것이다. 오직 사랑만이 영원하다(직역하면 ‘무너지지 않는다’). ‘사랑’과 ‘믿음’과 ‘소망’은 언제나 남아있는 완전한 구원의 관계다. ‘믿음’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참된 관계에 대한 영원한 표징이고, 하느님을 인식하는 길이다. ‘소망’은 종교개혁자 칼뱅(Jean Calvin: 1509-1564)이 말한 것처럼 ‘믿음 안에서의 인내’다. 그런데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나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왜 사랑이 으뜸가는 은사라는 말일까? 믿음과 소망은 인간으로부터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이지만,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고, 사랑은 하느님 자신의 본성이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