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이후 장군⑪이대용] 베트남전 종전때 공사로 교민구출하다 포로···자랑스런 육사인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이대용은 1925년 황해도 금천 출신으로 월남하여 육사 7기생으로 임관하였다. 6.25전쟁이 터지자 이대용은 6사단 7연대 중대장으로 춘천회전을 비롯해 20여 차례 전투에 참가했다.

또 북진 중에는 최선두로 압록강에 도달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수통에 압록강 물을 떠 바쳤다. 7연대장은 임부택 중령이었는데, 임부택은 일본군 하사관 출신으로 이병형 장군과 함께 6.25 전쟁 중 가장 전투를 잘한 장교로 꼽힌다.

이대용은 대령은 3차로, 장군은 마지막으로 진급했다. 심사위원 장우주 장군이 심사위원장 반대를 무릅쓰고 이대용을 강력히 추천하자 심사위원장은 이대용을 예비로 써넣어 박정희 대통령이 고르게끔 하는 묘수를 발휘한 덕분이었다. 인재를 중히 여긴 장우주 장군에 대한 에피소드는 많다. 특히 육사발전기금 이사장으로 있으며 해놓은 업적은 누구도 따라가기 어렵다.

박정희는 이대용을 바로 알아보고 진급을 시켰다. 박정희가 6관구사령관일 때 이대용은 작전참모였다. 박정희는 그후에도 사실상 무보직 상태나 다름없는 관구부사령관이라는 한직에 있던 이대용을 골프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후 소장으로 특진시킨 후 예편시켜 월남에 공사로 보냈다.

이대용은 1975년 월남 패망 시 주월한국대사관 공사로서 교민 구출에 최선을 다하다 월맹군에 포로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대용을 구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유태인 아이젠버그의 주선 등으로 이대용은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 시절 교섭이 진행되어 최규하 대통령 때 조국에 돌아왔다.

이대용은 298일 동안 햇볕을 보지 못하였고, 76kg이던 체중은 49kg으로 줄어들었다.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유명한 박영수 등이 월맹과 협의를 진행해 장군인 이대용을 전향시켜 선전에 이용하려 하였으나 이대용은 끝내 거부하였다.

이대용의 애국충절은 한결같았다. 이대용의 애국심과 의지에 감격한 월맹군 심문관이 후일 한국에 대사로 왔을 때 진정으로 이대용을 존경한다는 심경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대용 장군은 ‘자랑스러운 육사인’으로 상을 받았다.

한편 이대용 장군과 달리 자랑스런 육사인에 선정된 사람들 가운데 문제가 있는 이도 있었다. 상을 주는 취지는 좋으나, 선정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다수결로 할 것도 아니요, 국회선진화법 같이 60% 이상으로 할 것도 아니다. 신라의 화백제도, 또는 교황의 선출 같이 이론(異論)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년 꼭 선정하려고 무리를 할 것도 없다.

요즈음 ‘자랑스러운 육사인’으로 선정된 사람 가운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추태를 부리는 사람도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특히 명예직, 봉사직이 되어야 할 자리에서 공사(公私)를 제대로 가리지 않고 온갖 수뢰와 횡령이 판을 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재향군인회가 복마전이라는 투서가 들어와 보훈처에서 감사해보니 실태는 그 이상이라고 한다. 1군사령관 출신의 조남풍 회장의 청렴(integrity)이 의심받고 있다. 재향군인회는 구조적으로 각 회장들이 데려온 심복들이 저마다 밥그릇을 챙기는 봉건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재향군인회에 전혀 인연이 없고 개혁의 요처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 와서 개혁해야 한다.

이대용 장군 같이 조국에 충성과 절개를 다 바친 분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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