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미 김무성 대표의 친미발언과 6.25 금성전투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B.C. 108년 漢 무제가 4군을 설치한 이래 중국은 한민족을 끊임없이 침략해왔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민족이 중국과 자웅을 결하여 승리한 싸움으로 살수대첩, 안시성 싸움, 귀주대첩이 있다. 6.25전쟁에서는 금성전투가 여기에 해당한다.
1953년 6월 중공군은 3개 군(군단)으로 금성지구의 국군 2군단에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다. 목표는 금성 돌출부의 제거였으나, 한국의 휴전 반대의지를 꺾으려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6월 10일 시작된 중공군의 공격으로 전선은 크게 흔들렸고 6월 18일에야 겨우 수습되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온 세계가 경악하였다. 흥분한 모택동은 “정전협전 체결을 미루고 한국군 1만명을 살육하라”고 명령하였다. 7월 10일 중공군 20병단은 15개 사단으로 금성천 북방에서 국군 2군단을 공격하였다, 국군방어선이 분단되고 대혼란이 야기되었다.
테일러 8군사령관은 백선엽 참모총장을 대구에서 불러올려 정일권 군단장을 돕게 하고, 경비행기로 11사단을 투입하는 등 필사적으로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에 임하였다. 7월 18일에 전선은 안정되었다. 중공군은 2만8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국군도 1만4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단독북진론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한국군에 씻을 수 없는 패전의 상처를 남겨준 뒤 휴전협정 조인을 마무리 하겠다”는 모택동의 공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모든 전투, 작전이 고비가 아닌 것이 없지만 1953년 7월의 금성전투야말로 한국의 존망을 가르는 전투였다. 금성전투 직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국민들은 금성전투의 기억이 강하지 않으나, 6.25전쟁의 전 과정에 참여했던 백선엽 장군은 금성전투가 가장 고비였다고 회고한다. 금성전투는 당태종의 대군을 상대한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와 같다. 고구려와 당이 동북아의 패권을 놓고 겨룬 결정적 전투가 안시성전투였다고 한다면 금성전투는 국군과 중공군이 모든 힘을 기울여 겨룬 전역이었다.
금성전투에 실패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에 함락된 것은 세계사의 큰 획을 그은다. 마찬가지로 금성전투에서 무너졌다면 한반도는 중국의 한 省이 되는 동아시아 역사의 큰 획이 그어졌을 것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미국은 우리의 유일한 동맹국이라고 하면서 “중국보다는 미국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일부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굳이 ‘~보다는 ‘이라는 직설적인 어법을 쓸 필요가 있었느냐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김무성 대표는 잘한 것이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어법을 쓰는 것이 미국은 물론이지만, 중국에도 다 같이 좋은 것이다. 시진핑도 이에 시비를 걸지 못할 것이다. 아니 걸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통치자로서 그는 미국이 한국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누구보다도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의 동맹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되풀이할 것도 없다.
“한국군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라”는 모택동의 공언을 잊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다. 9월 3일 중국의 대일 전승기념일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할 것인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