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경영대가 마쓰시타 고노스케 “지옥과 수도원, 뭐가 같고 뭐가 다른가?”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말했다. “지옥과 수도원의 공통점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불평을 하느냐, 감사를 하느냐 뿐이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몇 년 전에 일본의 벳부온천을 다녀왔다. ‘지옥’하면 상상되는진한 유황냄새에 설설 끓는 물, 그리고 무시무시한 도깨비들이 지키고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바로 그런 느낌이 벳부에 산재해 있다. 그때 죄를 짓고 저 지옥 탕에 던져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불교에는 ‘8대 지옥’과 명부시왕(冥府十王)이 다스리는 ‘10대 지옥’이 있다고 한다. 8대 지옥론은 부처님이 직접 설법하신 것이고, 시왕의 지옥론은 대승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후에 발전된 중국적인 지옥론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지옥은 바로 우리가 만들어내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으로 인한 결과라고 한다.
이렇게 무서운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첫째, 자기도취(自己陶醉)의 지옥이다. 주변에 공주병이나 왕자병에 걸린 분을 생각해보라. 정말 못 말리는 병이다. 땅콩회항의 조연아씨가 이런 병에 걸린 것 아닐까? 인생의 아름다움은 나이가 들수록 고개를 숙이고 겸양하는 데 미덕(美德)이 있다.
둘째, 비판(批判)의 지옥이다. 이 지옥에 들어간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없다. 독방에 들어가 수형생활을 하는 사람과 같다. 항상 너그럽고 부드럽게 덕을 베풀며 남의 말에 경청하는 습관을 기르지 않으면 그 독방에서 나오기는 힘들다.
셋째, 절망의 지옥이다. 절망의 지옥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데도 의외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즉 이들은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하며 절망한다. 반대로 언제나 희망의 끈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인생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살아간다.
넷째, 과거지향의 지옥이다. 이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은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한다. 생각해보면 현재가 더 좋은데 말이다. 과거에만 연연하다 보니 현재를 제대로 발전시킬 수가 없다. 현재의 분수나 처지를 알아야 한다. 처지에 안분(安分)하고 매사에 감사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현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다섯째, 선망(羨望)의 지옥이다.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는 속담이 꼭 들어맞는다. 내 떡의 소중함을 모르고 남의 떡만 크게 보는 것이다. 세상엔 언제나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이 많은 법이다. 항상 올려다보지만 말고 내 발밑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아비규환의 나락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보라.
여섯째, 질투(嫉妬)의 지옥이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고 싶어진다.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 잘 되어야 내게도 볕들 날 있을 것이고, 내 주위의 사람이 거목으로 자라야 오뉴월 땡볕에 그늘을 만들어 쉴 수 있는데 말이다. 부처님 말씀에 ‘수희공덕(隨喜功德)’이라는 것이 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같이 기뻐만 해주어도 공덕이라는 것이다. 이 공덕이 바로 형(刑)을 경감시키는 자료가 된다.
지옥은 절망의 나락이다. 그런데 한줄기 희망도 있다. 죄를 저지르면 분명 그에 대한 응보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구원을 통해 고통을 덜 받고 반성을 한다면 이 또한 벌을 대체하는 효과가 있다. 그 방법은 바로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는 것’이다.
어느 산골마을의 조그마한 교당을 맡고 계시는 교무(敎務)님이 콩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다. 잡초가 너무 많아 뽑아도 뽑아도 쉬이 줄지 않았다. 이걸 지켜보던 마군이가 교무님을 조롱했다. “교무님, 힘드시죠? 이런데도 감사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교무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회심의 미소를 띄며 마군이에게 말했다. “진리부처님! 감사합니다. 이 많은 잡초가 메뚜기처럼 튀어 다니지 않고 한 자리에 있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지옥생활을 이겨내는 방법은 빨리 지옥에서 나오는 방법이 최고다.
일본 최고의 경영인인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말했다. “지옥과 수도원의 공통점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불평을 하느냐, 감사를 하느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