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한국군, 북한군과 싸워 이기려면?

전방 운천 1기갑여단에 교육차 다녀왔다. “폭풍같이 기동하라”는 부대훈이 인상적이었는데 기계화부대의 본질과 위력을 이만큼 잘 나타내기도 힘들 것이다. 여단 지휘부 앞 바위에 새겨져 있는 병형상수(兵形象水)라는 문구도 인상적이었다. “군대의 형세는 물을 본받는다”는 것이니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면서 막힌 데는 둘러가고 모이면 거대한 힘을 발휘하듯 하라”는 뜻으로 손자병법 중에서도 명구인데 병법에 조예가 깊었던 초기 여단장이 고른 것일 것이다.

1968년 육군 최초의 기갑여단인 1기갑여단이 창설되었다. 6.25 전쟁에서 북한군의 탱크에 놀란 국군은 기갑전력 증강을 서둘렀으나, 1960년대 후반까지도 사단에 1개 전차중대가 있는 정도에 그쳤다. 때문에 본격적인 기갑부대인 1기갑여단이 창설된 데 대해 롬멜 등 독일군의 전격전에 매료되어 기갑병과를 택한 기갑장교들은 감회가 컸다. 1975년부터 시작한 율곡계획으로 기갑전력의 증강은 가속을 받았다. 현재 한국군 기계화 부대는 아파치 헬기급으로 기갑부대를 지원할 항공전력의 보강 등은 계속 필요하나 전차와 장갑차는 상당한 수준에 달했다.

국방개혁안에 의하면 6개 기동보병사단 중 3개는 해체하되, 군단 기갑여단을 보강하는 방법으로 기갑전력은 유지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사단을 해체하는 문제는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일본에서 1차대전이 끝난 1920년대 우가키 가스시게 육상은 4개 사단을 감축하고 대신 학교군사교련을 창설하고 항공연대, 전차대대 등을 확장하는 등, 군비절용과 육군의 근대화를 과감히 추진하였다. 그러나 군부의 반대는 맹렬하였다. 사단의 인원을 감축한다는 것과 사단을 폐지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우가키가 21개 사단 가운데 4개 사단을 감축하는 것은 해군이 주력함 21척 중 4척을 침몰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극언도 있었다.

일본의 1개 사단은 2개 보병여단, 1개 기병여단, 1개 포병여단 등을 포함하는데, 평시에 기간요원만 충원하나 전시에 동원되면 2만5천에 달하는 전략단위였다. 해양국가 영국의 육군 편성과 운용방법을 응용한 것이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대공세를 설마리에서 저지하였던 글로스터 연대의 실제병력은 1개 대대였다) 일본 본토에는 13개 사단이 주둔하였는데, 관동, 관서, 동북, 구주, 북해도 등 지역별로 1개 사단, 도쿄t에 근위사단이 주둔하였다. 얼마 전 12개 사단 체제 당시 자위대의 배치도 이대로다. 조선에는 경성에 19사단, 평양에 20사단이 주둔하였고 용산에 조선군사령부가 있었는데 지금의 미8군사령부가 있는 자리다. 역사는 반복된다.

상당수 고급 장성이 대장의 꿈이 사라졌고 젊은 장교들도 우가키 반대의 분위기가 강해졌으나 우가키는 굴하지 않고 4개 사단 감축을 밀어 붙였다. 그러나 우가키는 뒤에 그 앙갚음을 톡톡히 받게 된다. 1937년 우가키는 조각을 명받게 된다. 그러나 육군은 우가키 내각에 육군대신을 보낼 수 없다고 비토를 걸었다. 육군대신이 없으면 내각이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우가키는 조각을 포기하게 되고, 그 뒤는 만주사변 시 명령이 없는데도 독단 월경하여 ‘월경장군‘으로 유명한 林 銑十郞 내각이 들어서게 되는데 그는 육군의 괴뢰내각으로 불렸다. 이후 도오조 등 군부의 독재는 태평양전쟁까지 치달아 일본을 패망으로 내몰게 된다.

물론 오늘날 한국군에 이런 불손한 사태가 일어날 우려는 전혀 없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무리한 추진은 후환을 가져온다”는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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