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영원한 의사’ 박승철 SARS대책위원장님 영전에
“기자가 술을 안 마실 순 없어요. 그냥 드세요. 대신 술 한잔에 물 석잔은 꼭 마셔야 해요. 꼭!”
1일 75세를 일기로 별세한 박승철 삼성서울병원 상임고문은 기자가 만난 의사 중 으뜸의사다. 필자가 한국기자협회 회장이던 2004년 6월26일 제주에서 열린 전국여기자 세미나에서 ‘국민건강과 의료보도’를 주제로 강연을 할 때의 일이다. 박 고문은 기자들이 불가피하게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며 위와 같이 말씀하는 것이었다.
박 고문은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국가적인 과제로 떠오르던 당시 “사스가 우리나라에 발을 붙이지 못한 것에는 언론의 덕도 크다”며 “사스 확산경로를 언론에서 시시각각 보도함으로써 국민들의 경각심과 정부의 방역활동에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박 고문은 강연 말미에 광우병을 거론하면서 ‘광우병’보다는 사태를 정확하게 적시할 좋은 대체 명칭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한번도 이 질병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광우병’이라는 이름 탓에 잘못된 인식이 퍼져 일반 농가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며 “언론이 이름을 바꿔주면 시골 농가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려대의대 교수이던 1997년, 그를 두번째 만났을 때 불쑥 내게 말했다. “이 기자, 의대생들은 말요, 10명 중 두명만 똑똑하면 돼요. 그들은 의학기술도 개발하고, 의료기기도 발명해야 하고. 나머지는 마음이 훈훈한 게 최고요. 환자들 친절하고 따스하게 대해주면 절반은 병이 나아요. 진짜의사는 바로 그런 이들이지요.”
그후 매년 1~2차례 박 고문은 자신의 오랜 지인들-성하현 전 한화국토개발 대표,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김시복 전 보훈처 차장, 박정우 전 안기부 간부, 심현지 스테인글라스 조각가-식사자리에 필자를 불러주었다. 그의 천진스런 미소와 날카롭되 부드러운 언변은 단연 압권이었다.
박 고문은 우리나라 감염내과 권위자로 국가신종인플루엔자 대책위원장 등을 지냈다. 경복고와 서울대 의대 졸업 뒤 1971년 서울대에서 내과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77년 고려대 내과학교실 교수로 옮긴 후 2003년 사스 국가자문위원장을 맡았다. 2004~2006년 서울보훈병원장을 지냈고 2006년 대한인수공통전염병학회 창립회장을 맡았으며 한림원 종신회원이다.
2003년 중국 베이징 시장이 경질될 정도로 동아시아를 위협한 사스공포에서 한국이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숨은 공로라는 평가가 많다.
“손만 잘 씻어도 돼요. 사람들은 질병에 대해 과도하게 겁을 먹곤 하지요. 우리 의사들 탓도 있지만, 모든 걸 상식에서 판단하면 질병예방도 별 것 아니거든요.”
충남 홍성군 광천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의사가 꿈이었다. 양호반에 들어가 십자가가 그려진 구급통을 들고 의사놀이 하며 친구들 問診도 해줬다고 60년 지기 심현지 조각가는 회상한다. 평생 공직에 나서지 않던 그가 딱 한번 외도한 적이 있다. 서울보훈병원장으로 재직한 것이다.
“나라 위해 목숨바친 분들이 계신 곳에서 봉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 2004년 봄 필자는 담석제거를 위해 박 고문 권유로 닷새간 입원해 수술을 한 적이 있다. 박 고문을 가까이서 뵐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바쁜 틈틈이 한국전쟁과 4.19, 월남전, 그리고 광주부상자들을 찾아 위로하고 수십년 누워있는 이들의 친구가 돼주는 것이었다.
박 고문이 편찮으시단 소식을 들은 건 금년 초 프랑스 파리 심현지 선생님댁을 방문해서였다. 그 며칠 전 새해인사 겸 전화를 드렸을 때도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기에 짐작도 못했다.
“우리 친구 중 박 박사가 가장 오래 살 줄 알았어요. 담배도 30년 넘게 안 피웠는데 폐암으로 가다니, 어떤 친구들 부탁이라도 스스럼 없이 받아주던 ‘만인의 건강상담사’였는데, 근데 그 친구 분명 하늘나라 갔을 거예요. 진짜 착한 의사였거든요” 2일 오전 전화를 걸어오신 심현지 선생님 목소리가 어느새 떨렸다.
존경하는 박승철 박사님,
평생 흘리신 땀과 눈물이 인류의 건강한 삶으로 보상받으시길 기도드립니다.
먼길 편히 가시옵소서.
2014년 6월 2일 이상기 올림
아저씨.. 얼마전에 돌아가셨단 얘기를 멀리 캐나다에서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너무 많이 속상해 하셨어요. 그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부디 좋은곳에서 편안하시길 바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