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전시실을 걷다 보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가 눈에 들어왔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임시정부는 항저우와 전장, 창사와 광저우, 류저우를 거쳐 마침내 충칭에 이르렀다. 전시장에는 마지막 충칭 청사의 회의실까지 재현되어 있었다.
한 나라가 국토를 잃고도 정부를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했는지를 그 작은 회의실이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수천 킬로미터를 옮겨 다녔지만, 정부는 해산되지 않았다. 국토는 빼앗겼어도 법통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회의실 앞에 오래 서 있으니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춘추오패의 두 번째 패자로 꼽히는 진문공(晉文公), 이름은 중이(重耳)였다. 그 역시 나라를 잃은 사람이었다. 왕위 다툼을 피해 조국을 떠난 그는 19년 동안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위나라에서는 냉대를 받았고, 조나라에서는 조롱을 당했다. 제나라에서는 안락함에 머물 뻔했고, 송나라에서는 예우를 받았다. 초나라에서는 후한 대접을 받았으며, 마침내 진(秦)나라 목공의 도움으로 귀국하여 군주가 되었다. 망명은 그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훗날 천하의 패자(霸者)가 될 사람을 만들었다.
초나라 성왕은 중이에게 물었다. “훗날 그대가 나라를 되찾아 나와 싸우게 된다면, 내게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중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부득이 싸우게 된다면, 먼저 삼사(三舍)를 물러나겠습니다.” ‘사(舍)’는 군대가 하루 행군하는 거리이다. 삼사를 물러난다는 것은 결코 굴복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훗날 성복(城濮)의 전투에서 진나라와 초나라는 마침내 맞붙었다. 진문공은 실제로 군대를 후퇴시켜 약속을 지킨 뒤 전투를 벌였고, 마침내 승리하였다. 강해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품격이 있었기에 물러날 수 있었다.
독립기념관에서 충칭 임시정부 회의실을 바라보던 날, 나는 다시 이 고사를 떠올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중국 대륙을 떠돌며 살아남았다. 그 여정은 단순한 피난이 아니었다. 정부를 지키기 위한 망명이었다. 그 길에서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임시정부가 존속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주고 손을 내밀었다.
오늘의 국제정세는 그때와 전혀 다르다. 외교는 현재의 국익으로 판단해야 하고, 안보는 냉정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에는 국익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다.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이다.
진문공은 초나라와 싸웠다. 그러나 초나라의 은혜를 없었던 일로 만들지는 않았다. 삼사를 물러난다는 약속은 상대에게 빚을 갚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품격을 지키는 행위였다.
요즘 우리는 역사를 너무 쉽게 현재의 이해관계 속에서만 재단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느냐보다 먼저, 누구에게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를 기억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오래된 가르침인지도 모른다.
독립기념관을 나서며 나는 다시 충칭 회의실을 떠올렸다.
그 작은 회의실은 정부의 크기를 말해 준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기억이 얼마나 먼 길을 견딜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전 초나라 들판에서 들려온 한마디가 다시 마음에 맴돌았다.
“삼사를 물러나겠습니다.”
그 한마디는 패배의 언어가 아니었다.
은혜를 기억하는 나라만이 품격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2600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한 문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