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만남으로 시작된다. 한 사람의 품에 안겨 세상을 만나고, 누군가의 손을 잡으며 길을 걷고,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어떤 만남은 상처로 남고, 어떤 만남은 기쁨으로 피어나며, 또 어떤 만남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늘 기도한다. “하나님, 좋은 만남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 기도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에서 함께 살아가는 고려인 청소년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돌아보면 로뎀은 참으로 만남의 축복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은혜를 보여 주셨다.
그 만남의 시작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조용했고, 소박했고, 그래서 더 진실했다. 지성이와 하랑이를 만난 것은 분명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싱가포르에서 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던 지성이는 타국에서의 삶이 낯설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이 외국에서 공부할 때 곁에서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 준 현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따뜻한 기억은 지성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결국 그 기억은 이주민에 대한 이해와 포용의 마음으로 자라났다. 그래서 지성이는 고려인 청소년들에게도 자신이 그런 친구가 되어 주고 싶다고 했다. 그 마음은 참 예뻤다. 계산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 누군가의 외로움을 지나치지 않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마라톤 친구였던 하랑이를 로뎀에 소개하면서 로뎀과의 인연은 조금씩, 그러나 깊고 진하게 이어져 갔다.

로뎀의 아이들에게 한국 친구를 만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성이와 하랑이가 오는 날이면 아이들의 얼굴에는 설렘이 번졌고, 눈빛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나 역시 그것을 단순한 만남으로 보지 않았다. 한국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귀한 기회라 생각했기에, 아이들이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이 웃을 수 있도록 학사 일정 속에 여러 교류의 시간을 마련하곤 했다.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아이들은 더 가까워졌다. 해마다 진행하던 비전 캠프도 함께 가고, 노래를 부르고, 웃고,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쌓아 갔다. 그 시간들은 어느새 ‘친구’라는 단어보다 더 따뜻한 관계가 되었고, 아이들은 서로를 ‘친친’, 즉 친한 친구라 부르며 마음의 거리를 좁혀 갔다. 우정이 깊어질수록 지성이의 시선도 더 깊어졌다. 단순히 함께 웃고 노는 데서 멈추지 않고 로뎀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마음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시골 교회를 개조해 만든 학교는 교실이 턱없이 비좁고 공간은 늘 부족했다. 한창 뛰놀아야 할 나이의 아이들이 제대로 된 운동장 하나 없이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아쉬움을 대신하는 모습을 보며 지성이는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결심한 듯했다. 그 마음은 결국 행동으로 이어졌다. 지성이는 부모님께 로뎀 학교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학교를 위한 홍보 영상을 제작하겠다고 했다.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독, PD, 작가 등 영상 제작에 필요한 전문가들을 섭외하고 여러 날에 걸쳐 촬영을 진행했다. 아이들도 그 시간을 무척 즐거워했다. 카메라 앞에서 웃고, 서툴지만 진심을 담아 학교를 소개하며 자신들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는 눈빛을 보였다. 그리고 그 영상의 내레이션은 지성이가 직접 맡았다. 나는 지성이의 차분하고 잔잔한 목소리가 참 좋았다. 그 안에는 꾸미지 않은 진심이 있었고 조용히 스며드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지성이 어머니는 매우 아쉬워하셨다. 좀 더 힘 있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였으면 좋겠다고 하시며 오히려 내게 미안해하셨다. 하지만 내게는 그 모든 과정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누군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 마음을 내어주고 시간을 쓰고 정성을 쏟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위로였기 때문이다.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갔을 때 나는 작은 기대를 품었다. 이 영상이 어디론가 흘러가 또 다른 좋은 만남을 데려오지 않을까,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리고 누군가의 걸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은 기대만큼 따뜻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반응은 크지 않았고 조회수도 쉽게 오르지 않았다. 아마 홍보 인프라가 부족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눈에 띄는 변화가 없자 내 마음에는 안타까움이 차올랐다. 한국 친구가 고려인 친구들을 위해 건축을 돕고 싶어 하는 그 아름다운 마음이 그저 마음으로만 남아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늘 사람이 기대하지 않은 자리에서 길을 여신다. 어느 날 지성이 어머니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지성이와 하랑이가 마라톤을 통해 기부금을 모으겠다고 했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고맙고 대견한 마음이 밀려왔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컸다. 마라톤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지성이는 대학 진학을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성이 어머니는 참 밝고 단단한 분이셨다. 괜찮다고, 해볼 수 있다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게 학교 로고를 보내 달라고 하셨다. 티셔츠에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 로고를 넣어 유니폼처럼 입고 뛰겠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 마음 한편이 먹먹해졌다. 미안함도 있었고 감사함도 있었고 설명하기 어려운 벅참도 있었다. 누군가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 땀을 흘리겠다고 한다는 것, 그 땀방울로 사랑을 증명하겠다고 한다는 것은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 친구들이 고려인 친구들을 위해 뛴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는 기대보다 먼저 기도하게 되었다. “아버지, 이 만남을 축복하여 주십시오. 이 작은 시작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랑은 헛되이 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가 오래도록 기도해 온 만남의 축복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열매를 맺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성이와 하랑이가 마라톤으로 기부금을 모으겠다는 소식을 들었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학교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뛰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다시 기도하게 되었다. 이 만남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랑은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