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 가야 할 곳은 아니었다. 길이 나서 잠시 들른 곳이었다. 그런데 돌아와 생각해 보니, 나는 그날 다른 어떤 곳보다 그에게 더 가까이 갔던 것 같다.
바위에는 시 한 편이 새겨져 있었다. 제목은 ‘비슬산 가는 길’. 그 옆에는 시인의 이름 ‘무산 조오현’, 그리고 아래에는 서예가의 이름 ‘근원 김양동’이 새겨져 있었다. 산은 그 둘을 말없이 품고 서 있었다.
나는 잠시 서 있다가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메아리가 칠 만큼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수줍어하지도 않았다. 시의 운율 3·4, 3·4, 3·5, 4·3을 따라 천천히 읽었다. 마치 바위 속에 있는 시인에게 들으라는 듯이.
그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런 장면을 떠올렸었다. 바랑을 멨지만 허리는 꼿꼿한 노승이 잠시 속세에 나왔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가는 모습. 멀리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초판에서는 첫 연의 마지막 구절이 ‘스님 돌아가는 걸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동안 서 있다가 사진을 찍었다. 뒷면의 설명을 찍을 때는 쪼그려 앉아야 했다. 그리고 다시 주차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산에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피안교를 건너 사바세계로 환속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백담사나 만해마을에서 그를 뵙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저 노인이 건강하게 오래 계셔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어제는 그런 걱정이 없었다. 그 시가 새겨진 바위는 그대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서 섧던 죽음.

이제는 그의 미소가 떠오른다.
오늘도 나는 사바세계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외래 환자를 만나고, 상처를 보고, 다시 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문득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잠시 꿈속에서 다녀온 산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