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넘어 ‘아름다움’으로…소설가·영화감독·성형외과의를 잇는 상상의 힘

상상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에서일까, 아니면 천재적 두뇌의 산물일까.
나는 얼마 전 한 강연장에서 이 질문을 다시 붙들게 되었다. 1970~80년대 한국 영화의 격랑 속을 건너온 영화감독 이장호를 만나 “창의성은 어디에서 오느냐”고 물었을 때였다. 그는 즉답을 피했다. 대신 오래전 친구였던 소설가 최인호 이야기와, 죄책감과 은혜에 대한 회고를 들려주었다. 답은 설명이 아니라 삶 속에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생각했다. 소설가와 영화감독, 그리고 성형외과 의사는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보이지만, 혹시 그들의 상상에는 공통의 뿌리가 있지 않을까.

최인호의 상상은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세상을 창조한다기보다, 이미 사라져버린 세계를 붙들어 언어로 되살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소설은 상처를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상처를 꿰맨다. 『별들의 고향』이 단순한 외로움의 서사가 아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급속한 현대화 속에서 균열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의미를 길어 올렸다. 상상은 고통을 이야기로 번역하는 작업이었다.

이장호의 상상은 또 달랐다. 그는 “몸의 죄 속에서 살았다”고 고백했다. 그의 영화는 관념이 아니라 육체와 본능, 환멸과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가 향한 곳은 늘 인간의 존엄이었다. 『어둠의 자식들』과 『바람불어 좋은 날』은 혼란한 시대를 노출시키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남는 연약한 아름다움을 포착했다. 상상은 도피가 아니라 직면이었다.
그리고 성형외과 의사가 있다. 그의 상상은 언어도 이미지도 아닌 ‘형태’로 나타난다. 부서진 얼굴 앞에서 그는 먼저 기능과 구조를 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이 회복될 수 있는지, 어떤 조화가 가능할지를 마음속에 먼저 그려야 한다. 상상은 손끝에서 해부학으로 구현된다. 절개는 교정이자 고백이며, 봉합은 생존과 존엄을 동시에 복원하는 행위다.
세 사람의 매체는 다르다. 소설가는 이야기로, 감독은 이미지로, 외과의는 몸으로 작업한다. 그러나 그들의 상상은 하나의 순환을 따른다.
불완전함이 공감을 낳고, 공감이 상상을 낳으며, 상상이 형식으로 변형된다. 상상은 완벽함을 향한 욕망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결핍에서, 상처에서, 균열에서 시작된다. 불완전함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볼 때, 그 안에서 무언가를 회복하고자 하는 충동이 생긴다. 그것이 상상의 출발점이다.
강연이 끝난 뒤 이장호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최인호를 만난 건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상상의 기원은 고독한 천재성에 있지 않다. 만남에 있다. 다른 이야기와의 만남, 다른 상처와의 만남, 타인의 고통과의 만남.
결국 상상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손상 너머를 보려는 의지다. 세상이 흉터만을 바라볼 때, 그 안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존엄을 보려는 선택.
페이지에서 스크린을 거쳐 피부에 이르기까지, 상상의 근원은 하나다. 공감. 그리고 세상이 상처만을 말할 때에도, 아름다움을 끝까지 보려는 인간의 의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