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에서 열린 학회를 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몇 해 전 보았던 영화 <포화 속으로>의 한 장면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총을 들던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나는 그들이 서 있었던 자리, 포항여중을 직접 보고 싶었다.
정문 앞에는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가 서 있었다.
1950년 8월 11일. 학도의용군 71명. 11시간 30분. 48명 전사.
숫자는 또렷했고 단정했다. 그러나 그 숫자 안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체온이 있었다.
비석에는 14명의 전사자와 13명의 생환자 이름만이 새겨져 있었다. 34명의 전사자는 이름을 알 수 없고, 20명의 생환자 역시 기록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은 싸웠지만 불린 적이 없었다. 이름 없이 죽고, 이름 없이 살아남았다.

언덕 위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동판에는 지역별 출신 학교와 전사자 수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서울 출신 전사자 261명. 서울중학교 30명, 대광중학교 11명, 동산중학교 11명, 서울공대 10명, 고려대 10명…. 그리고 ‘서울의대 1명.’
나는 그 ‘1명’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한 사람. 한 이름. 어딘가에서 부모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형제였을 한 사람.

집으로 돌아와 서울대학교 기록관을 찾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재학생 29명의 명단이 남아 있었다. 공과대학, 농과대학, 문리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그리고 의과대학. 숫자와 학과는 남아 있었지만, 그들의 삶은 거기에서 멈추어 있었다.
관악캠퍼스 문화관 로비의 추모비 앞에서 나는 두 이름을 읽었다. 박승익. 전성재. 소리 내어 읽는 순간, 돌에 새겨진 글자가 잠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연건의 교정을 걸으며 생각했다. 졸업을 눈앞에 둔 젊은 학생들이 책 대신 M1 소총을 들었던 그날, ‘조국’은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거창한 구호였을까. 아니면 지켜야 할 누군가의 얼굴이었을까.
신화 속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이를 되찾기 위해 이름을 불렀고, 피그말리온은 돌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와 같은 일이다. 사라진 존재를 다시 불러 세우는 일이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그러나 우리가 이름을 부르는 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하루. 학교에 가고, 병원에 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 일상은 누군가에게는 지켜야 했던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통계가 아니라 사람으로, 그들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1951년 5월과 9월, 의학과 3학년과 의예과 1학년은 전장에서 생을 마쳤다. 아직 흰 가운의 무게도 알지 못한 채였다. 오늘 병원 복도를 걷다가 문득 생각한다.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이 복도 어딘가에서 환자의 맥을 짚고 있지 않았을까. 총 대신 청진기를 들었을 손. 그 손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다 부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때로 치료보다 오래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