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상)
나는 왜 ‘없지’ 않고 ‘있을’까요? 사실 우리는 원래 없어도 되는 존재였습니다. 굳이 이 땅에 있지 않아도 세상은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렇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있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감탄하시며 좋아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내기도 전에 그저 존재하고 있는 상태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쓸모’를 기뻐합니다. ‘그가 나에게 얼마나 쓸모 있는가?’, ‘내가 그에게 얼마나 이익을 가져다주는가?’ 이게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몸값을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쓸모가 있어서, 이해타산이 맞아서 우리를 기뻐하신 게 아닙니다. 그분의 지으심을 따라 존재하고 있는 그 자체를 심히 좋다고 하셨습니다.
사장은 이익을 가져다주어야 기뻐하지만, 부모는 아이가 그저 태어나 준 것만으로도 기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장님’이 아닌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것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안식을 누리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시고 쉬셨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품을 먼저 경험해야 일할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존재하는 기쁨을 맛본 자만이 기쁘게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창작물을 대하는 그 애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림이든 노래든 조형물이든 그것의 어떤 쓸모를 계산하기 전에 자신이 만든 노래이기에 사랑하고, 자신이 그린 그림이기에 아끼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만들었고, 사랑하기 때문에 창작의 고통을 견딥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피조물을 만드신 것은, 자신의 무한함을 제한하면서까지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주신 ‘사랑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지어진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라 고백하는 신앙이란 나도 누군가의 있음을 있는 그대로 기뻐할 줄 아는 힘입니다. 그의 기능적 가치가 아니라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는 안목이야말로 믿음의 눈이고 영안입니다. 이해관계 속에서 기대할 수 없는 눈입니다.
교회와 가정만이라도 서로의 있음을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쓸모를 증명해야 기뻐해 주는 사람 곁에서는 늘 긴장하게 되지만, 나의 존재 자체를 기뻐해 주는 사람 곁에 있으면 비로소 숨을 쉽니다.
잠깐묵상 유튜브로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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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묵상 두 번째 이야기
<서툰 인생, 잠깐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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