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의 번화가, 포그라니치나야 거리(구 개척리)를 걸어본다.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이곳에서 고려인(19세기 말 이주한 조선인)과 망명 우국지사들의 사라진 발자취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흔적이 없다면 영혼의 울림은 있으려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망명 우국지사들은 러시아의 보호와 고려인 동포들의 지원을 기대하며 신세계로 여겨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밀물처럼 입국한다.
1906년 전후,1차로 망명한 이용익, 유인석, 이범윤, 이상설, 이동녕, 안중근 등 선구자와 1910년 전후 입국하는 이종호, 홍범도, 이동휘, 안창호, 신채호 등 수많은 조선 독립운동가의 자취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오늘 우리가 만나려는 것은 우수리스크 수이푼허(수분하)에서 순국한 헤이그 밀사 이상설(1870-1917)과 그가 꿈 꾸던 원대한 이상과 현실, 그를 좌절시킨 장벽이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는 어떤 배경에서 파견되었고, 그 이후 이상설은 어떤 활동을 이어갔을까? 그는 단순한 구한말 외교관에 불과할까?

시대상황을 알기 위해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전후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과 고종의 퇴위, 그리고 1910년의 경술국치(한일 합병)의 과정에 대한 반복적 조명이 필요했다.
조선인의 항일운동은 1905년 11월 일본에 강제로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 체결 직후부터 격렬한 무력저항과 시위, 자결 등으로 투쟁을 펼쳐나갔다. 한편으로는 국외에서의 효과적인 항일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대상 지역은 한인이 다수 존재하며, 일본의 힘이 상대적으로 미칠 수 없는 한반도와 근접한 장소로 외교와 무력투쟁이 가능한 지역이어야 했다.
19세기 말부터 한인들이 다수 이주한 만주 간도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연추) 지역이 유망했다. 두 지역은 무력투쟁과 군사기지로는 유리하지만 열강의 지원을 받아 정치 외교 투쟁을 전개할 장소로는 고립된 공간이어서 부적합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서양의 조계지로 치외법권 지역인 상하이와 러시아에서는 연해주 중심도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모이기 시작했다.
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한 첫 번째 인물은 이범윤(전 간도관리사 1856-1940)으로 간도 지역의 사병 수백 명을 대동하여 1906년 연해주 연추 지역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그는 부대와 함께 연추 지역에 머물며 한동안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지 않았다. 아마도 부대의 유지와 보급 등의 문제로 연추 국경지대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에 도착한 첫 번째 인물은 1906년 전 의정부 참찬(정 2품 ) 이상설(1870-1917)과 이동녕, 정순만 등 남대문 상동교회 청년회 출신 우국 동지들이었다. 이상설은 원래 충북 진천 출생이지만 친척인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자로 입적하여 서울 저동(명동 인근)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서울 이주는 운명을 바꾸는 첫 번째 기로가 된다. 양부의 재력으로 비교적 유복했던 그는 명동 이웃에 사는 영의정 이유원의 자손 이회영 형제들과 교우하고, 청년기에는 인접한 남대문 상동교회에 다니며 청년회에 가입한다. 이상설은 선교사들로부터 신학문과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고, 선교사 헐버트 박사와는 특별히 친밀하였다.
여기서 이상설은 우리 역사의 근현대사를 주름잡는 쟁쟁한 인물들 이른바 상동파를 만나서 후원자 역할을 하게된다. 상동청년회의 면면을 보면 이회영, 이승만, 이동녕, 노백린, 이동휘, 이준, 안창호, 김구, 최남선, 양기탁, 전덕기 등이 공부방 동지들이었다. 모두 독립협회 회원이었고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상설은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시험(이승만, 김구도 응시했으나 낙방)에 급제한 관료로 유학과 신학문에 동시에 출중한 인재였다. 그는 조선에서 ‘근대 수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수학 과학은 물론 국제법 외국어에 능했다. 기록에 의하면 돈암동 신흥사(흥천사)에서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는 것이다. 이런 탁월한 지적 능력과 근왕정신이 그를 헤이그 특사로 발탁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1904년 일본에 대한 황무지개척권양도 반대투쟁과 1905년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주도하며 고종의 신망과 여론의 지지를 얻은 이상설이었다. 만국평화회의 1년 전인 1906년, 고종으로부터 헤이그 특사 밀명을 받은 이상설은 그 해 4월 부모님 성묘를 위장하며 망명길에 들어선다. 이제 그의 운명은 2차 기로에 섰다. 목적지는 북간도 용정이었다. 용정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인재를 육성하며 왕명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북간도 용정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먼 길이었다. 망명동지 이동녕(1869-1940,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정순만(해조신문 주필 1873-1911)과 함께 서울에서 인천항으로 이동하여 상하이에 도착한다. 다시 러시아 배편으로 갈아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국경지역 고려인부락 연추(크라스키노)를 거쳐 그 해 10월 북간도 용정에 도착하게 된다.
원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선편도 있었을 텐데라는 의문도 있지만 알 길이 없다. 지금의 교통여건이라면 비행기로 2시간 정도의 거리다. 그 거리를 돌아 돌아 6개월이 소요된 고난의 망명길이었다. 선구자의 길은 이렇듯 길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이어서 조선의 고위관료 출신 전 탁지부 대신 이용익(1854-1907)이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입국했다. 이용익도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열강의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인천에서 중국으로 출발했다. 유럽행을 시도하던 중 옌타이(연태) 항에서 일본 관헌에게 적발된다. 이후 중국 상하이를 거쳐 1907년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다. 1905년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기도 한 재력가였던 그는, 이곳에 체류하며 함경도 출신이 다수인 현지 고려인들의 반일운동을 후원했다. 1907년 2월 말 병사하며 그의 손자 이종호(보성전문학교 2대 교주)가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북간도 용정에 도착한 이상설은 이동녕 정순만과 함께 최초의 해외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한다. 북간도 서전평야에 위치한 서전서숙은 동포 청년들을 대상으로 무상으로 숙식과 교육을 제공하고, 교장은 이동녕이며 자금은 이상설이 지원했다. 고종으로부터 받은 내탕금과 이상설 개인 집과 토지를 처분한 재산이었다. 서전서숙은 이상설이 1907년 헤이그 밀사로 떠남에 따라 폐교되었지만 용정의 명동학교로 이어졌다.
1907년 5월 조선으로부터 전 평리원(재판소) 검사 이준(1859-1907)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이상설은 용정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이준을 만났다. 이상설이 정사, 이준은 부사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헤이그를 향해 출발한다. 이동 중 상트페데르부르그에서 전 러시아 공사 이범진(1852-1910)과 만나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1887-?)을 통역으로 대동하고 헤이그에 6월 25일에 도착한다.

일본의 방해활동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이 좌절되었다. 현지 언론과 시민단체를 대상으로 을사늑약의 무효와 조선의 독립을 선전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실의에 빠진 부사 이준은 현지에서 지병으로 순국하였다. 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일제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군대가 해산되는 비상사태를 맞았다. 이어서 8월 9일 궐석재판에서 이상설은 사형, 이위종은 종신형에 처해져 이상설은 조선으로의 입국이 불가능해졌다. 이상설은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었다. 교육과 외교를 넘어 독립혁명을 꿈 꾸는 혁명가로 나아간다.
이제 운명은 그에게 세 번째 기로에 다가섰다. 이상설은 귀국을 포기하고 유럽과 미주를 순회하며 외교활동과 민족운동을 펼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콜로라도주 덴버 등 한인을 방문하며, 미주독립운동 단체와 연대한 후 1908년 여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유럽과 미주에서 세계정세의 변화를 체험했다. 그는 ‘왕권의 보존’에서 나아가 ‘민주공화정’이 대세임을 알게 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항일운동에 집중한다.
1907년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되면서 국내에서 항일투쟁이 격렬해지고 러시아로 망명하는 독립지사들이 줄을 이었다. 1907년 말 무인 안중근(1879-1910)도 의병투쟁의 활로를 찾아 북간도 용정을 거쳐 러시아 연추에 입국하여, 1908년 8월에 국내 진공 투쟁을 전개했으나 실패한다. 안중근은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던 중, 1908년 말에 블라디보스토크로 진출해 이상설을 만나게 된다. 이상설은 9년 년하인 안중근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안중근은 “이상설은 세계대세에 능통하고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큰 인물, 대신의 그릇으로 법률에 밝고 영어 일어 러시아어가 능하다.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사람”이었다고 뤼순 감옥에서 회고한다. 인물은 역시 인물을 알아본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르빈에 잠입하여 이등박문을 격살하는 의거를 펼쳤다. 이 모든 과정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결되는 원대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이었다.

1909-1910년간에는 이상설도 새로운 항일운동의 활로를 모색한다. 안중근의 하르빈 의거로 항일분위기가 고양되었다. 그것은 분열된 무장세력을 통합하고 독립운동기지와 자치촌, 한인학교를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1910년 6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장 유인석, 이범윤과 만나 연해주와 간도 일대의 의병을 통합하는 “13도 의군”을 편성하였다. 그해 7월에는 항일의 상징으로 고종의 러시아 망명 추진과 독립자금의 지원을 요청한다. 그는 명예욕심이 없어 항상 대표자리를 양보했다. 그는 겸손한 일꾼이었다는 평이다.
1910년 8월 들어 대한제국을 병합하려는 일본의 동향이 조선황제와 각료들을 겁박하며 노골화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들은 조선의 망명객 이상설, 유인석, 이범윤, 정재관을 중심으로 병합을 저지하기 위한 조직적 움직임을 벌인다. 그들은 독립운동단체인 ‘성명회(聲鳴會, 일본을 성토하고 울리게 한다는 뜻)’를 결성하고 항일시위를 벌인다.
8월 23일 러시아 신문보도를 통해 한일합병이 확정되었다는 비극적 소식을 접했다. 개척리의 한인학교에 모여 합병 무효와 무력으로 저지한다는 격문을 배포하고 각국 정부에 발송하였다. 그날 밤 분노하는 성명회 소속 청년회원들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고 거리를 점령했다. 분노의 물결은 조선반도보다 더욱 강렬했다.
일본은 러시아에 강력히 항의했다. 9월 일본 측의 주동자 체포 및 인도 요구로 ’13도 의군’의 간부 42명이 체포되며 활동이 중단되었다. 러시아 당국은 ‘성명회’를 해체시키고 이상설은 대한제국의 특사였다는 점을 고려해 우수리스크로 추방되었다.
다시 우수리스크에서 돌아온 이상설은 독립운동 기지를 소만국경지역에 설치하는 계획을 수립한다. 미주교포들의 지원과 국내의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이동휘, 안창호, 신채호 등 이 직접 참여한다. 그들은 연해주 항카호 남쪽 중국 봉밀산(중국어,미산) 자락에 미주지역 교포가 지원한 자금으로 수백만 평의 토지를 매입하고, 교민 1백 가구를 이주시키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곳에 한흥동(한국 부흥마을), 한민학교를 건설하여 병농일체의 독립기지를 건설하여 국내로 진공 시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이상설은 한편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새 전략을 모색하여 러시아 당국과 화합을 모색했다. 1911년 12월 개척리에서 옮긴 새로운 한국거리 신한촌에서 독립운동조직 ‘권업회'(실업을 권장하는 모임)를 결성한다. 의장 이상설과 부의장 이종호로 하바롭스크 등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세력을 확대한 결과 1914년에 회원 8,579명으로 확대되었다.
1912년 5월에는 기관지 ‘권업신문’을 창간하고 러시아인 주고프를 주간으로 이상설은 주필로 장도빈을 논설위원으로 민족활동을 계속하였다.
더 나아가 1914년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광복군정부’라는 망명 군사정부를 수립하고 정통령(대통령)에 피선되었다. 이는 비밀조직으로 존재했지만 상당한 준비를 하였음이 입증된다. 이 조직은 1917년 전로한족중앙회, 1919년 대한국민의회(러시아 임시정부)로 독립운동의 전통이 승계된 것이다.
1914년은 희비가 교차하는 한 해였다.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의 활성화와 고려인 이주 50주년이기도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관계로 변하는 반전이 일어난 해였다. 그 해 8월 러시아는 동맹국 일본의 요구에 따라 독립운동단체 ‘권업회’를 해산하고 ‘권업신문’도 2년 만에 폐간시켰다. 따라서 1914년 8월부터 1917년 러시아혁명까지는 연해주 독립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졌다.
4번째 기로였다. 세차게 불어닥치는 시베리아북풍같은 운명에 도전하기로 했다. 하바롭스크로 추방된 이상설은 1915년 3월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향 모색을 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이동했다. 상하이에서 ‘신한혁명당’을 결성하고 광복군의 무장활동과 대일전쟁방안을 강구하며 본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중국정부의 협조가 불발되고,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좌절당하며 활동이 또다시 중단된다. 그의 나이 40대 중반, 대륙의 한풍속에 기력도 쇄했다.

실의에 빠진 이상설은 1916년 초 베이징에서 건강이 악화되며, 하바롭스크를 경유하여 우수리스크 교포 이민복의 집으로 이동하며 정양한다. 1906년 대륙으로 떠나며 이별한 지 10년 만에 부인 달성 서씨와 자 정희, 동생 상익을 마지막으로 호출해 상봉한다.
상봉이 곧 이별이었다. 국가와 민족에 헌신하고 가족에게 등한한 역경의 삶! 1917년 3월 2일 48세에 대륙의 차가운 땅 우수리스크의 한 벽지에서 동지들의 오열속에 순국한다.
”내 몸과 유품과 유구는 모두 불태우고, 재를 바다에 날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내 국토를 잃어버렸는데 어느 흙에 누를 끼치리오” 죽는 날까지 올곧은 기개를 보인, 민족에게 헌신적인 겸손한 천재, 투사의 마지막 길이었다. 유서에 따라 그의 유골은 산화되어 수이푼허 강에 던져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1년 10월 우수리스크에 유허비가 건립되어 원혼을 달래고 있다. 2017년 ‘이상설순국 1백주년기념 사업’ 으로 생가인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소재 이상설기념관이 건립되었다.
1945년 해방 후, 생존한 동료 독립운동가들이 말한다. 이 혼란기에 과연 누가 민족을 지도할 진정한 지도자감이었는가? 헌신적 천재 이상설과 설득의 실천가 안창호가 있었다면 세상은 달라졌을 거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