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고난을 받으라!” 행복을 빌어 줘야 할 사람에게 고난을 받으라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편지입니다. 아들처럼 아끼는 디모데에게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편지에서 고난을 받으라니. 아무리 그게 중요해도 그렇지, 말은 좋게 해줄 수 있었던 것 아닌가요? 덕담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일까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어쩌면 바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덕담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디모데를 향해 빌 수 있는 최고의 복, 디모데에게 해줄 수 있는 애정 어린 조언은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왜일까요? “젊어서는 고생도 사서 하는 거야”라는 의미로 고난을 받으라고 말한 것일까요? 젊은 시절에 겪은 고난이 결국 인생의 밑거름이 된다는 위로이자 격려로 그렇게 말한 것일까요? 만약 그랬다면 바울은 뭡니까? 노인이 된 바울은 뭐가 그리 좋아서 그 고생을 하고 있냐는 것입니다. 왕년에 고생 좀 했으면 노년에는 일선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안위를 돌봐도 손가락질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은퇴를 선언하면 도리어 주변에서 수고했다고 박수를 쳐 주지 않았을까요?
바울은 노인이 되어가는 나이에도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안락한 노후 대신 차가운 감옥을 선택했습니다. 오히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복음은 그런 건가 봅니다. 젊음을 바치고 노후를 바쳐도, 목숨을 걸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 일생을 쏟아붓고 마지막 남은 기력까지 다 짜내어 드려도 더욱 그리하고 싶은 신비가 십자가의 복음 안에 있습니다. 다 잃은 것 같은데 알고 보니 모든 것을 얻었다는 고백을 바울은 그렇게 디모데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지난날을 조금이라도 후회했다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고, “적당히 하며 살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을 면류관처럼 여기며 그 면류관을 아들에게도 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이토록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영원한 가치가 나에게는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편지를 성경에 기록되게 하셔서 이후의 수많은 디모데들에게 발송하셨습니다. 오늘 그 편지가 우리 손에도 들려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답장을 쓰게 될까요?
잠깐묵상 유튜브로 듣기
https://youtu.be/2mtmI3CdHlo?si=rLGM05WYF1iJ9k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