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칼럼

‘플러스 알파’는 ‘Everything’ 혹은 ‘Nothing’?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라디아서 1:9)

바울은 편지의 서두에서 그 흔한 인사말도 없이 다짜고짜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는 지금 ‘다른 복음’을 말하는 이들에게 몹시 화가 난 상태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이란 “예수를 믿지 말라”는 배교의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아예 예수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인지도 모릅니다. ‘나’를 믿으면서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인간은 왜 십자가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까요? 왜 은혜 앞에서 2% 부족함을 느끼고 다른 무언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얘기에 끌리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상 전적인 은혜는 용납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주어지는 은혜 앞에서 우리는 감사를 느끼는 동시에 본능적인 의구심과 불편함을 느낍니다.

우리는 은혜보다 계약을 더 좋아합니다. 계약을 체결하고 구원에 대한 ‘지분’을 확보함으로 비록 소액 주주일지언정 당당한 주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전적인 은혜’는 나를 무능력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구원 열차의 무임승차자로 앉아 있는 것이 때로는 민망합니다. 그래서 주머니를 뒤져 동전 한 닢 가치도 안 되는 나의 열심, 나의 도덕성, 나의 공로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합니다. “그래도 밥값은 제가 낸 겁니다.” 그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은혜라는 빚을 진 자보다 하나님과의 대등한 거래자의 자리를 즐기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 플러스 알파’를 찾는 심리에는 체크리스트가 주는 안정감도 깔려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명령은 매 순간 깨어 고민해야 하는 고단한 일이지만, ‘무슨 봉사를 해라’, ‘얼마를 헌금해라’, ‘무슨 훈련 프로그램을 수료해라’와 같은 지침은 자기 계발의 체크리스트처럼 명확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의 표시, 그 확실한 성적표를 손에 쥐었을 때 느끼는 안정감이 구원의 감격을 대체해버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불안한 자아는 자꾸만 ‘예수 플러스 알파’를 찾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 + α’는 ‘Everything’이 아니라, 결국 ‘Nothing’이 될 뿐입니다. 오직 ‘예수 + Nothing’만이 우리에게 ‘Everything’이 됩니다.

잠깐묵상 유튜브로 듣기
https://youtu.be/D3M1-6XwGlU?si=NHZ1oty7-VaxyUmf

석문섭

베이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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