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여류: 시가 있는 풍경] 나무를 닮을 수 있다면

함안 향교 은행나무

감히 나무를 닮는 게 허락된다면
주목이나 구상나무였으면 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나무이고 싶소?’ 하고
누군가 그리 묻는다면
부끄럼 무릅쓰고 주목이나 구상나무요 하고 대답할 터이다

소백산 비로봉에서 천동 계곡을 굽어보는 자락
천년의 세월로 우뚝한 그 주목 군락이나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제석봉으로 이어진 능선 따라
바위벽을 울리는 거친 바람 속에서도
사철 의연한 그 구상나무들
한라산 백록담에서 관음사로 향하는 그 언저리
낮은 어깨 위에 하얀 눈 이고 더 청정한 그 구상나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흐릿하던 내 정신이 청량하게 깨어나는 것 같았다

생전에 내 공덕이 깊지 못하여
주목이나 구상나무 같은 닦음에 턱없이 미치지 못함을 알지만
소망하는 것은 그 자체로 큰 허물이 되지 않는다면
남은 길에서의 커다란 소망 하나는
이번 생을 떠난 뒤의 내 모습이
저 주목이나 구상나무를 닮았으면 하는 것이다

인연이 다하여 생명을 여윈 뒤에도
생시인 듯 선 자태 그대로 한 점 허물지 않고
지녔던 것들 차례로 비워가면서
세월이 지날수록
마침내 덧붙여진 것들 모두 다 덜어낸 뒤에도
하얗게 자태 눈부신
제 유골로 천년의 사리탑을 쌓는 저 주목이나 구상나무 같은

이병철

시인, 생명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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