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
선듯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구절입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야곱만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할 수 있을까요? 야곱은 선택받고 에서는 버림받는 이 불공평함을 사람들은 불편하게 느낍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한편, 우리 사회에는 ‘저런 인간은 지옥에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쇄 살인마나 입에 담기조차 역겨운 범죄를 저지른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조차 구원받을 수 있다는 얘기에 사람들은 거품을 뭅니다. 그런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지옥에 보내시는 하나님도, 구원의 하나님도 매우 못마땅해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옳습니다. 자신이 기준이고 싶습니다. 누가 야곱인지, 누가 에서인지, 그 기준을 자신이 정하지 않으면 매우 불편한 것입니다.
사실, 이 구절의 핵심은 야곱이나 에서가 누구인지가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이기에 사랑을 받거나 미움을 받느냐가 아닙니다. 핵심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입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원래 에서가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장자권’은 에서에게 있었습니다.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을 가졌습니다.
야곱의 선택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던 바로 그것을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여기며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규칙, 상식, 자격 조건, 기준과 같은 틀을 깨고 차남,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즉, 이 구절은 선택받거나 버림받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들을 선택하거나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이스라엘은 한참 착각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늘 ‘선택받은 자신들’이 누구인가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야곱의 혈통이니까, 다른 민족보다 뭐라도 더 나으니까 하나님이 선택한 거다’라는 착각입니다.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뭐가 더 나아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애초에 차남의 혈통으로 버려질 운명을 하나님이 은혜로 선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에서)마저 야곱처럼 사랑하시기로 예정하셨습니다.
우리가 ‘불공평하다’ 여겼던 바로 그 주권적 사랑 때문에, 자격 없는 우리까지 구원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을 향해 그 어느 누구도 ‘에서’로 규정하거나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잠깐묵상 유튜브로 듣기
https://youtu.be/LwGlswU674E?si=Xf2gz0XaQ5h5Y0M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