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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섭의 고려인 청소년⑪] “동토의 땅 일구며 생명 이어온 고려인 후예 마리아 응원해”

홈베이킹 동아리 때 열심히 반죽하고 있는 마리아. 파샤, 안나,밀레나, 안겔리나 등이 보인다

전혀 모르는 번호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목사님 저는 인천에 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한국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선명한 한국 발음이 아니라는 생각에 고려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 여학생이 있는데 작년 당시 17세, 이름은 마리아였고 인천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지금 안산에서 학교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안산에서도 입학이 어렵다며 안성에서는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사정을 모두 듣지는 않았지만 이미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유엔아동권리협약(UNCRC)은 1989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국제인권조약으로, 18세 미만 아동의 생존, 보호, 발달, 참여의 권리를 보장한다. 우리나라는 1991년 비준했다. 주요 원칙은 인종, 언어, 성별, 종교, 출신, 재산, 장애 등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에도 거부당하는 경우가 많다.

중도입국 고려인 청소년들은 부모가 먼저 노동자로 한국에 와 자리를 잡은 뒤, 어느 정도 생활 기반이 마련되면 본국에 있는 아이를 데려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부모와 헤어진 지 적게는 2년, 많게는 10년까지 걸리기도 한다. “엄마가 데리러 올게. 조금만 기다려” 하며 중앙아시아에서 떠났던 부모들은 한국의 힘든 생활로 자녀 이주가 늦어진다. 본국에서 조부모나 친척 집에 머물던 고려인 청소년들은 사춘기가 되어 갑작스레 한국으로 이주한다. 한국 공교육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학적 서류를 준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제는 중학교까지는 공교육 진입이 어렵지 않지만 자유롭게 입학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특히 고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학교장 재량에 달려 있다. 그래서 17~18세 청소년은 입학 자체가 매우 어렵다. 무작정 거절할 수 없으니 대부분 학교에서는 “정원이 다 찼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외국인 아이의 편입이 학교에 큰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한 아이의 진로와 미래가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팀 프로젝트 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한 마리아

나는 전화를 건 사람에게 절차를 알려주었다. 먼저 로뎀에 입학시키고, 그동안 내가 학교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곧바로 움직였다. 안성의 K고등학교에 전화해 교무부장 선생님께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예상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 A고등학교, 결과는 같았다. J고등학교에 전화해 교무부장에게 사정을 말했다. 마침 J고등학교에는 우리 학교에 위탁 보내는 학생들이 있어 설명이 쉬웠다. “입학만 받아주시고 저희 학교로 위탁해주시면 책임지고 지도하겠습니다. 원적교 선생님들 부담도 크지 않으실 겁니다.” 나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스스로도 힘이 실렸다. 침이 마르고 답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교감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답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기다릴 수 없어 바로 J고등학교로 차를 몰았다.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직접 가서 교감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교무실로 들어가며 죄지은 학부모처럼 긴장했다. 가운데 앉은 분에게 다가가 “안녕하세요,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 소학섭 교장입니다”라고 인사했다. 교무부장 선생님이 놀라 교감에게 나를 소개했다.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마리아를 받아주겠구나.’ 로또에 당첨된 것 같은 마음이었다.

마리아는 나의 주소지로 전입신고를 하고 동거인으로 서류를 준비해 제출했다. 학교에 등교시키며 위탁 절차까지 모두 마쳤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역할이었다.

혼자 있길 좋아하던 마리아

하지만 마리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점심도 혼자 먹었고 쉬는 시간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괜한 오지랖으로 받은 건 아닌가’ 겁이 났다. 그래서 기도로 시작했다. 마리아의 닫힌 마음이 열리기를 기도했다.

마리아는 엄마와 오빠, 동생과 인천에서 살았다. 밖에 잘 나가지 않았고 집에서도 늘 핸드폰만 했다고 한다. 한국 이주 후 마음이 완전히 닫힌 것이다. 아버지는 러시아에 있으며 알코올중독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무거운 짐을 혼자 지고 있는 것처럼 마음의 문을 닫았을까? 한국 생활이 버거웠던 것이다. 오빠는 공장에서 일했고 동생은 어렸다. 엄마 혼자 세 남매를 책임져야 했다.

고려인 청소년들의 한국 적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 물론 잘 적응하는 청소년들도 많다. 로뎀에 입학할 당시 어둡던 아이들, 힘들어하던 아이들은 점점 생기를 되찾고 웃음을 찾는다.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한국 생활도 낯설지 않게 되며 이제는 마치 대한민국 할아버지 나라의 손자들처럼 보인다. 나는 이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믿고 또 다른 아이들을 기다린다.

결론적으로 지금 마리아는 나를 ‘파파(아빠)’라고 부른다. 급식도 잘 먹고 장난도 잘 친다. 마음의 문이 열렸다는 뜻일 것이다. 조금은 안심되지만 걱정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매우 힘든 시간을 건너온 고려인 청소년들, 그들에게 출발선은 공평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겨낼 것이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공평하지 않을지라도 극복할 것이다.

왜냐하면 동토의 땅을 사람이 사는 땅으로 일구며 생명을 이어온 고려인이기 때문이다. 고려인에게는 죽지 않는 생명력의 유전자가 있다. 이는 대한민국 민족성의 씨앗 아닐까. 고려인은 분명 대한민국이다. 역사였고 미래다.

물론 마리아에게도 언젠가 과거의 상처가 다시 돋아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이 올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기도한다. 그 모든 시간을 이겨내고 성장하여,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 건강한 청년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잇는 인재가 될 것이라고. (다음호 계속)

요트체험에서 필자와 마리아

소학섭

(사)청소년미래연구 이사장,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 이사장 겸 교장, 다문화전문가 2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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