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한가운데 있는 학교는 시골교회를 개조해 만든 곳이다. 학교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논길을 따라 들어오며 의아해한다. “이런 곳에 학교가 있다니…” 혹은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잘못 안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려인 청소년,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 학생들은 이곳에 오면 한결같이 러시아어로 감탄한다. “오이!(감탄사) 우리 동네랑 똑같네!” 논 한가운데 우뚝 선 학교의 위치가 이들에게는 정서적·심리적으로 매우 친근한 환경이 된 것이다.

학교 설립 당시 접근성이 떨어져 고민하던 나에게 아내는 생각의 전환을 제안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외지고 구석진 곳이 단점으로 보일 수 있으나, 고려인 청소년들에게는 본국과 유사한 환경일 뿐 아니라 도시가 아니어서 아이들 관리도 용이하니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조언은 적중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국으로 이주한 중도 입국 고려인 청소년 대부분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한국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힘들어한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살아가야 하니 무조건 한국문화에 동화되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도 없다. CIS(구소련) 지역 출신으로 유럽에 가까운 문화에 익숙한 이들에게 문화는 곧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대한민국의 문화를 직접 경험할 기회를 자주 마련하려 한다.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에서는 한국문화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할 과목이며, 특히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일은 교육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이번에는 한국의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인 ‘성년례(成年禮)’를 직접 경험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성년례는 부모의 보살핌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 인정받는 의식으로,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이어온 통과의례다.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한국의 피를 이어받은 고려인으로서 이 전통을 몸소 체험한 것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정체성과 성숙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전통 의식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대신 졸업식이나 생일파티, 성인식 등으로 대체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예(禮)’와 ‘책임’의 정신이 약화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번 성년례 체험은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매우 뜻깊은 예식이었다. 유럽 문화에 가까운 고려인 청소년들에게는 더욱 의미 있는 경험이 되었다.

행사는 전통 예절복을 입는 것으로 시작됐다. 남학생은 도포를, 여학생은 한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묶었다. 얼마 전 추석 행사에서 한복을 입어본 경험이 있던 아이들에게는 조금 익숙한 복장이었다. 의식을 주관한 선생님은 “복장은 마음을 다스리는 첫걸음”이라 말씀하셨다. 익숙하지 않은 동작들로 힘들어하면서도 열심히 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성년례가 단순한 흥미 위주의 행사가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고 책임을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랐다.

뒷줄 한콘스탄틴, 이디마, 최유리,신콘스탄틴,김영광,김막심,강알렉스,아르쫌(왼쪽부터)
의식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주례로서 아이들에게 덕담을 전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의 눈빛은 샛별처럼 빛났고, 한국 사회에서 훌륭한 인재로 살아갈 자신감이 느껴졌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훌륭한 고려인으로서 스스로 책임지는 어른이 되라”고 당부하며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느꼈다. 이 의식이 단순히 어른이 되는 형식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 그리고 다짐의 시간임을. 성년례는 ‘뿌리’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게 해주었다.
해외에서 태어나 자란 고려인 청소년들에게 한국문화는 낯설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체험을 통해 자신들의 안에 흐르는 한국인의 피와 정신을 새롭게 인식했을 것이다.
성년례를 마친 후, 영광이가 말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이번 성년례를 통해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짧은 전통문화 체험이 아이들의 마음을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오늘 하루를 허락하시고 이런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아마도 성년례를 경험한 고려인 청소년들에게 오늘은 진정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한 의미 있는 하루였을 것이다.

요즘 사회에서는 ‘성숙한 어른’이라는 개념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나이만 많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거나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모습이 많다. 이런 시대일수록 전통문화 속에서 인간의 근본을 되돌아보는 일이 중요하다. 성년례는 단지 옛 의식이 아니라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성숙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살아 있는 교육이다. 이번 체험을 통해 배운 성숙의 의미가 고려인 청소년뿐 아니라 다양한 배경의 청소년들에게도 확산되기를 바란다. 문화는 국경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잇는 다리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성년이 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그것은 한국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다짐일 것이다.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한국의 전통과 고려인의 정신을 아름답게 이어가기를 바란다. 내년에도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이 소중한 경험을 전해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것이 이번 성년례가 내게 남긴 가장 큰 선물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