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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의 아무르 답사⑭] 솔제니친의 부활과 러시아의 영광(푸틴)·중국몽(시진핑)·MAGA(트럼프)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솔제니친의 동상

‘러시아의 양심’ 솔제니친, 제국의 얼굴이 되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해양광장에는 턱수염이 지긋한 인물이 힘차게 팔을 뻗고 있는 동상이 목격됐다. 동상의 위치는 바로 러시아 태평양함대사령부 옆 잠수함박물관 앞 광장이다. 누구일까?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솔제니친(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18-2008)의 동상이다.

​대문호 솔제니친의 동상이 왜 이곳에 위치할까? 그의 문학이나 활동은 이 극동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와 어떤 연관을 가진 것이며, 연해주 한인의 독립운동 역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러시아의 양심이라는 작가의 동상이 러시아 태평양함대사령부 앞에 자리잡고 있다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도덕과 정의의 힘’이라 압축되는 러시아 작가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 등으로 우리 세대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저항작가로 매우 친숙하다. 그는 1918년 러시아 남부 흑해주변 키슬로보츠크시에서 출생해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시와는 관련이 없다. 솔제니친의 아버지는 러시아제국 군대의 장교였으며, 어머니는 대지주의 딸이었다. 태생적으로 그는 자유인이었고, 보수적 민족주의자로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솔제니친, 도덕과 정의의 흉상

그가 출생한 1918년 전후는 1차세계대전과 소비에트혁명의 시기로 혁명과 테러, 전쟁과 공포가 분출하는 소용돌이의 대전환기였다. 그는 1941년 흑해연안의 로스토프대학을 졸업하고 통신대학에서 문학과정을 수료했다. 1941년 독일에 의해 소련에 대한 침략전쟁이 발생하자 군에 입대하여 포병장교로 참전했다. 1945년 2월 장교로 근무중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군의 검열에 걸려 체포되었다.

​편지 내용중에 스탈린을 비방한 죄로 강제수용소에 보내진다. 8년간(1945-1953)의 노동교화형을 받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 것이다. 이 독재의 광풍은 1924년 1월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집권한 시기부터 시작한다.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까지 약 30년간 전 러시아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친다.

​스탈린 정권하의 강제연행과 처형은 1930년대부터 연해주지역 고려인에게도 예외 없다. 고려인 지도자급 5천여 명이 일본을 위한 간첩죄와 반란모의 등의 죄로 강제노역과 징역,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1937년에는 17만명의 연해주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하는 끔찍한 디아스포라를 겪게 된다. 조선인도, 전 세계도 전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광풍으로 소련에서는 공식 기록으로 170만 명이 구속되고 72만 명이 사형처분을 받은 것으로 되어있다. 비공식적 기록으로는 2000만-2500만 명이 기간 중 타살(아사 포함)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에서 1925년 사이에 태어난 소련 남성의 50% 이상이 전쟁과 독재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끔찍한 사실이 우리를 전율케한다.

이 광란의 살인극은 1953년 스탈린의 죽음으로 비로소 끝이 났다.

​생전 스탈린은 소련을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만든 위대한 승리자라는 숭배를 받았다. 그것은 무자비한 숙청과 공포정치로 이룬 것이었다. 그의 사망 후 스탈린체제는 사상누각으로 맥없이 무너졌다.

강제노동수용소(굴락)에서 석방된 솔제니친은 1957년까지 카자흐스탄으로 다시 추방처분을 받는다. 1957년 사면된 후 중학교 교사로 복직하며 강제노역과 유형지에서 겪은 사실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1960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펴내며 인권유린과 독재체제의 잔학상을 폭로해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 체제저항적 글을 저술하며 한편으로는 사전검열폐지를 강력히 요구하며 당국과 충돌한다. 솔제니친은 1969년에는 ‘반소작가’로 낙인찍혀 모진 탄압을 받으며 ‘소련작가동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1970년에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다. 이어서 죽음을 각오하고 쓴 ‘수용소 군도’ 원고를 해외로 반출한다. 그가 쓴 글 속에서 고려인들의 강제노동과 감금의 비참한 실상이 희미하나마 밝혀졌다. 그러나 자유세계에 속한 우리는 소설 속의 진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전모가 밝혀지는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어둠의 소비에트체제가 붕괴되는 1990년대 들어서였다.

​소련당국은 1958년에도 닥터지바고로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를 좌초시킨 경험이 있었다. 소련작가동맹에서 제명과 시민권박탈, 국외추방의 위협으로 파스테르나크 스스로 노벨상 수상을 거부케 한 것이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작태였지만 소련 내부에는 공산당의 선전과 홍보가 먹혀들었다. 빵과 몽둥이 앞에 자유와 인권은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이었다.

​솔제니친은 파스테르나크와는 달리 소련공산당의 살해 위협에 굴하지 않고 해외추방을 택한다. 1974년 브란트 서독수상의 중재로 독일과 스위스를 거쳐 미국 버몬트의 시골로 은둔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숨어지내지만 미국 천민자본주의의 민낯에 얼굴을 돌리게 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계속 돌고 있었다. 고르바초프(1931-2022)가 소련공산당 지도자로 등장하고 글라드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개방)를 내세운 후 1991년 소비에트 공산당체제가 무너졌다 . 극도의 혼란과 권위의 추락 속에서 고르바초프는 실각하고 옐친이라는 급진 개혁파가 득세한다. 옐친은 솔제니친의 시민권을 회복시키고 귀국을 허용했다.

솔제니친은 추방된 지 20년 만에 1994년 5월 감격의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그는 서유럽을 통과하는 일반적 귀국코스를 택하지 않고, 앵커리지(알라스카)-마가단(러시아 북태평양 항구도시)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극동경로를 택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기관차, 블라디크역

5월 27일 극동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꿈에 그리던 조국 러시아를 횡단하는 시베리아열차에 탑승한다. 아마 이것은 그가 강제수용소의 어두운 시절부터 미국 은둔시기에 꿈꾸던 대 로망이었을 것이다.

자작나무가 짙게 깔린 시베리아 평원 러시아를 가슴으로 깊게 호흡하며, 떠오르는 위대한 태양처럼 다가온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변도시 곳곳을 기착하며 2개월간 강연과 기자회견으로 귀국을 장식했다. 그는 진격하는 군대처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박해받던 지식인들을 감격과 흥분 속으로 몰아넣었다.

대리석에 새겨진 시베리아횡단열차 노선,블라디크 역

솔제니친은 표트르대제가 이룩한 제정러시아의 영광을 시베리아 장정에서 구상한 것일까? 독재권력과 공산주의의 해체를 본 그에게 새롭게 떠오른 이념은 대러시아주의의 환상이었다. 그가 외치던 ‘도덕과 정의’는 ‘전통적 애국주의와 국수적 민족주의’로 대체된다.

“나라를 파멸로 몰아간 지도자가 주는 훈장을 받을 수 없다”며 옐친 대통령의 문화훈장을 거부한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옐친의 후계자로 권력을 장악하며 경제사회적 혼란을 극복한 것을 높이 평가하며 푸틴의 노선을 강력히 지지한다.

​2008년 솔제니친이 사망했다. 푸틴 대통령은 솔제니친의 ‘전통적 애국주의’를 추종하며 모스크바의 ‘대공산주의자 거리’를 ‘솔제니친 거리’로 명명한다. 솔제니친이 러시아로 귀국하며 밟은 첫 번째 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솔제니친의 동상이 러시아 태평양함대 앞 광장에 세워진다.

러시아의 영광, 권력자의 야망

푸틴은 ‘러시아의 영광’을 복원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의 옛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유라시아 맹주의 유혹에 빠져 들었다. 그것은 주변국에 대한 전쟁과 간섭, 영토확장의 제국주의 패권주의로 귀착되었다. 이것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일단이라면 이 전쟁은 서방의 구상대로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혁명의 위선을 폭로하며 인권과 자유의 투사로 각인되던 지성인 솔제니친은 러시아 대국주의자, 국수적 애국주의자의 숭배대상으로 변했다.

‘러시아의 영광(푸틴)’, ‘중국몽(시진핑)’, ‘MAGA(트럼프)’가 뒤엉킨 신패권주의는 어떤 격랑과 광풍을 동아시아로 몰아칠 것인가!

고려인들의 강제처벌과 강제이주의 고통을 세계에 알린 작가 솔제니친의 시대적 변화를 보며 착잡한 심정을 검푸른 아무르해에 투영해 본다.

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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