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초 러시아지역 한인독립운동의 성지는 블라디보스토크(약어:블라디크)이며, 그 중심은 ‘신한촌‘이라 불리는 지역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은 어떻게 언제 생겨났을까? 오늘은 블라디보스토크 독립운동의 거점 신한촌을 찾아보기로 한다.
1870년 초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고려인'(1864년 이후 조선에서 이주한 한인)들이 집단거주한 곳은 아무르만 남쪽 평지인 바닷가였다. 이곳은 현재의 시내 중심가인 포그라니치나야 거리 1번지이며 고려인들은 ‘개척리(러시아어: 카레이스키 스카야)’라 불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할 때까지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생존에 매달려야 했으며, 망해가는 조국에 대해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러일전쟁에 참전한 고려인 출신 군인이 귀환하고, 을사늑약 직후 간도관리사 이범윤(1856-1940)이 1906년 부대와 함께 연해주 연추 지역으로 피신한다. 이때부터 고려인들은 일본에 침략당하는 조국이 처한 현실에 눈을 뜬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고종의 밀사 이상설(1870-1917 )이 블라디크에 도착하고, 무력투쟁을 시도하는 무골 안중근(1879-1910)이 연추 국경지역에 잠입해온다. 구한말 의병운동의 상징인물 의암 유인석(1842-1915)도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입국하면서 반일의식은 한층 거양된다. 이들 선구자의 망명으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이 연해주사회에 빠르게 확산하기 시작했다.
중국지역의 독립운동이 만주와 상해를 중심으로 1910년 중반 이후 전개되는 양상에 비하면, 연해주의 독립운동 흐름은 10년 정도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여기에 연해주에서 자립에 성공한 고려인 주요인물들이 속속 가세한다. 연해주 최고의 재력가로 성공한 최재형(1860-1920)의 지원으로 안중근이 국경지역 연추에서 1908년 4월 무장부대 ‘동의회’를 조직한다. 동의회는 안중근을 대장으로 의병 수십 명을 함경북도로 진격하는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안중근의 활동은 진격작전의 공과와 러시아 당국의 압력으로 한계에 직면했다. 안중근은 국내진격전에서 요인암살로 전략을 변경하고 1909년 2월에 ‘동의단지동맹‘을 조직한다. 1909년 10월 26일 동지들과 함께 북만주 하르빈에서 망국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역사적 의거를 성공시킨다. 안중근은 거사지가 중국 하르빈일 뿐 러시아 지역에서 훈련하고 기획된 독립투쟁의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1908년 2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서 고려인 출신 해운재력가 최봉준(1862-1917)이 해외에서는 최초로 한글로 된 일간신문 해조신문을 창간한다. 최봉준은 경성의 언론인 장지연을 주필로 초청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양시킨다. 해조신문이 일본의 압력으로 3개월 만에 폐간된 후, 그 전통은 ‘대동공보‘로 이어지며 자금을 재력가 최재형이 지원한다. 대동공보의 취재망에 잡힌 이토 히로부미의 하르빈 방문 정보는 안중근에게 전달되며 의거가 성공에 이르는 단초를 제공한다.
블라디크 고려인교민회장 김학만(1883-1931 함남 단천)도 1908년 개척리에 최초의 조선인학교인 ‘계동학교’를 개설하고 고려인들의 경제안정과 교육 자립운동을 활발히 펼친다. 최재형, 최봉준, 김학만을 연해주 3걸이라 부르는 이유다.

조선의 망명가들은 강력한 무력투쟁을, 고려인들은 언론 외교에 의한 합법적 투쟁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해외 독립운동의 이상과 현실은 항상 이 두 노선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1910년 조선이 망국의 길을 걷게 되는 국권침탈 직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개척리 철수 사건이 전개된다. 러시아 당국은 1911년 5월에 장티푸스가 ‘개척리’에 확산하자, 전염병 예방을 핑계로 고려인에게 떠나도록 강제명령을 내렸다.
고려인들은 블라디크의 서북쪽 척박하고 험한 높은 산등성이 쪽으로 밀려났다. 개척리 고려인들이 쫓겨난 후 새로 입주한 집단거주지가 ‘신한촌‘ 이였다. 이곳은 현재 ‘하바롭스카야 거리’라 불리는 곳이며, 이때부터 조선의 망명지사들이 신한촌으로 대거 모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신채호, 홍범도, 이동휘를 비롯한 조선에서 탈출한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고려인 재력가 최재형 최봉준 김학만의 도움을 받아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한인신보사, 대한국민의회, 한민학교 등 여러 한인단체와 독립운동조직이 신한촌 내에서 활동하게 된다.

우리가 방문한 개척리와 신한촌은 1937년 고려인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이후 폐허가 되어 역사적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개척리에는 고려인의 이주를 기념하는 ‘한인이주150주년 기념비‘를 2014년에 고려인연합회에서 포그라치나야 10번지에 건립하여 그 희미한 흔적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동휘선생과 무명 독립운동가 들을 기억하는 기념비’가 포그롭스키이 공원 옆 옥타리스카야 거리에 설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한 것도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보수적인 조선 군인에서 민족주의자로 다시 사회주의 혁명가로 거듭난 성제 이동휘였다. 그는 러시아 망명 후 신한촌에 거주했고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그의 삶의 역정을 다시 살펴보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신한촌도 실정은 비슷하였다. 1937년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하면서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한민학교 건물 등은 모두 소실되고 러시아인의 아파트와 상점 주택으로 변해버렸다.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고려인 학자들과 한국인 역사학자들에 의해 그 실체를 찾는 활동이 조심스럽게 전개되었다. 생존한 고려인 노인들의 현장 확인이 있었다. 1999년 ‘한민족연구소’가 신한촌기념비를 하바로프스카야 거리 입구에 건립하게 된다.
타국 영토에서 역사를 발굴하여 재생시킨다는 것은 이렇듯 어려운 작업이다.

우리도 안내에 따라 아파트로 변해버린 현장과 상점 앞에 서서 무상함을 실감할 뿐이었다.
다만 아무르만 쪽으로 이동해 작은 단서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러시아인의 주택에 ‘서울거리(세울스카야)‘라는 낡은 주소가 문 앞에 부착되어 있어, 이곳이 1910년대에 신한촌의 서울거리였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되었다. 소득이라면 이 답사여행의 계기가 된 일본육사 출신 독립투사 김경천 장군도 블라디크 신한촌을 수차레 방문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멸실되고 변모된 이 외국의 거리에서 한인들의 옛 모습을 찾아보는 건 사실상 상상과 추리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한촌의 옛 정경을 상기하려면 작가 이광수의 회상에 의존하는 게 더 인상적이다. 1914년 여름, 춘원 이광수(1892-1950)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고려인들이 거주하는 신한촌을 방문하게 된다. 이광수는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일찍이 10살 때 부모를 콜레라로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1905년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메이지학원에서 유학을 마치고 1911년 오산학교 교원이 되었다. 그는 오산학교 학감으로 재임 중 사표를 제출한다. 그리고 스물세살이 되던 해 겨울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이다.
춘원의 세계여행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도산 안창호의 초청을 받아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가서 샌프란시스코의 한인신문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는 것이었다. 이미 그는 1910년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하며 천재문인으로 필명을 높이고 있었다.
또 하나는 문학적 스승으로 숭배하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1828-1910)가 서거하자 러시아 여행에서 그 문학적 채취를 직접 호흡해 보려는 것이었다.

이광수는 1914년 여름 신한촌을 방문한 소감을 후일 글로 표현한다. “시가지를 다 지나 바윗등에 굴 붙듯이, 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아무르만을 바라보면 낭떠러지 밑에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절경지였다. 그리고 겨울이면 바다가 결빙하여 말과 사람이 빙판 위를 걸어 훈춘 연길 북간도로 오갈 수 있었다. 러시아풍의 나무로 건축한 작은 집에는 조선식 온돌방이 있었다”
이광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로 출발했다. 아무르강의 도시 치타를 통과 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1914년 9월) 유럽으로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불행히도 그의 미국행은 정지되고 그는 바이칼 호 주변에서 방랑하며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그의 인생길도 180도 바꿔버렸다.
만약에 그의 미국행이 이루어졌다면 그의 인생 경로는 친일변절이 아니라 이승만에 버금가는 애국지사로 탈바꿈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시베리아에서의 좌절과 방랑, 개인적 사랑의 비애를 소재로 구체화한 것이 1933년에 발표한 소설 ‘유정‘이다. 조선의 어떤 작가도 경험하기 어려운 도쿄-상해- 남만주- 하르빈 -블라디보스토크- 이르쿠츠크- 바이칼 호를 배경으로 국가를 넘나드는 체험적 소설을 구상한 것이다. 주인공 최석과 친구의 딸인 정임간의 운명적 사랑은 시베리아 대평원과 바이칼호수에서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최석은 본인 이광수이며 정임은 이광수의 둘째 부인 의사 허영숙을 모델로 그린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춘원은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와 함께 조선의 3대 문학천재로 손꼽혔다. 젊은 시절 그는 민족의 독립과 자존을 위한 활동에 매진했다. 1910년대부터 동경에서 유학하며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고,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편집장을 역임했고,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필명을 높인다. 그러나 식민통치가 장기화되고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일본이 욱일승천하며 국내에 거주하는 지식인들은 가혹한 탄압과 회유에 직면한다.
이광수도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투옥된 후 풀려나 전향선언을 하면서 식민지 말기 활동은 친일행적으로 일그러진다. 다만 이 부분도 철저히 검증해 보아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해방 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반민특위에 체포되는 비운을 겪고 6,25동란 중 납북되어 전쟁 중 사망한다.
남은 두 천재도 최남선은 친일의 길로, 홍명희는 친북으로 향하며 이념의 강에 빠져버렸다.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와 신한촌에서 춘원 이광수의 아련한 추억 속에 문학과 역사와 이념을 생각하는 상념에 잠시 잠겨본다.



